[최보식 칼럼] "'慰安所' 앞에 일본군들이 차례 기다리며 줄 서 있었다"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5.03.13 03:00

    일본군을 증오했지만 탄압이 어떠한지 알기에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한국인은 일본 통치에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대학생 리콴유(李光耀)는 기숙사에서 폭발음에 눈을 떴다. 1941년 12월 8일 새벽이었다. 영국 식민지인 싱가포르로 일본군이 쳐들어온 것이다.

    사흘 뒤 그는 거리에서 처음 일본군을 봤다. 왜소한 체구에 길게 착검한 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은 낯설었다. 군모(軍帽) 뒷자락에 흰 천이 달린 게 특이했다. 목욕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정글전을 치른 탓인지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일본군은 수적 열세에도 대담한 속공전(速攻戰)으로 영국군을 격파했다. 그때까지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던 백인 우월의 신화가 깨진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 아래 노예처럼 살던 아시아인들을 해방시키는 전쟁'이라는 일본의 선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훗날 싱가포르 총리가 된 리콴유는 이렇게 회고했다. "새로운 지배자가 된 일본군이 영국인보다 더 잔혹하고 더 난폭하며 더 부당하고 더 악의적으로 같은 아시아 민족인 우리를 다뤘다."

    일본군은 점령 직후 중국계 주민을 색출했다. 트럭 50여 대에 실어 해변으로 끌고 갔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이들에게 바다를 향해 걸어갈 것을 명령했다. 뒤에서 일본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군인들은 시체를 발로 차기도 하고 총검으로 찌르며 생존자가 없는지를 확인했다. 훗날 전범(戰犯) 재판에서 일본군은 '그때 반일(反日)분자 6000명을 죽였다'고 시인했다. 진상조사단은 그 수를 5만~10만명으로 추정했다.

    어느 날 극장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가보니, 주민의 잘린 머리가 장대에 걸려 있었다. 연병장에서 허수아비 표적에 총검을 꽂을 때 내지르는 일본군의 함성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흉노족 침략자들을 연상케 하는 흉포함이 있었다. 아마 칭기즈칸도 일본군보다 더 잔혹하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原爆)을 투하해야 했던 당위성을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만약 원폭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일본 본토를 비롯해 곳곳에서 아마 수백만 명의 불필요한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리콴유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시내 고급 주택가의 울타리 밖으로 일본군 200여 명이 차례를 기다리며 줄지어 선 모습을 봤다. 표지판에 '위안소(慰安所)'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인 여자들이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서비스를 해준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당시 나는 일본 군부가 어떻게 한국·중국·필리핀의 여성들을 납치하고 꾀어서 군부대를 따라다니는 위안부로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네덜란드 여성들을 장교용 위안부로 쓰기도 했다."

    종전 뒤 1946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일본 전범 재판을 그는 참관했다. 당시 검사는 개정(開廷) 논고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조사해보면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또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 혹시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자료를 뒤지고 또 뒤졌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다.'

    3년 반의 일본군 점령 시절을 겪은 리콴유는 이런 감상도 남겼다.

    "일본군의 유일한 통치 수단은 공포였다. 그들을 증오했지만 탄압이 어떠한지를 알았기에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인은 일본이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인의 풍습·문화·언어를 말살하려 했지만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국인은 굳은 결의로 야만적 압제자에게 항거했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해묵은 '리콴유 자서전(원제 싱가포르 스토리)'을 다시 꺼내 본 것은 무력감 때문이었다. 불가(佛家)에는 '대기(對機) 설법'이라는 게 있다. 상대방 수준에 맞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일본을 향해 "늘 자신의 과거를 마주 봐야 한다"고 했을 때 결정적으로 이 점에서 '실수'를 했다.

    일본 언론 매체 대부분은 메르켈의 충고를 무시하거나 한 줄짜리 기사로 끼워 넣었다. 하루 뜸을 들인 뒤 극우(極右) 산케이신문은 한 지면 전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기사로 채웠다. "일본과 독일은 상황이 다르다. 일본은 '홀로코스트' 같은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고 일축한 일본 외무상의 말을 해설해 놓았다.

    자신의 처지에서 보면 자신의 억울함만 보인다. 하지만 상대와 제3자 처지에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어른'이 되는 것이다. 전후(戰後) 70년이 됐으면 일본도 어른스러워질 때가 됐다.>
    하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신년사에서 "전쟁 시기의 일본을 왜곡하는 견해들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칼을 뽑아 들었다. 모두 제식훈련 하듯이 '역사 수정주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우익(右翼)이 주류가 된 일본 지식인 사회가 철벽처럼 옹호하고 있다. 이런 일본을 멈춰 세울 방법은 사실 별로 없다. 그들 내부 각성의 힘이 아니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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