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A은행 지점 직원 정모(38)씨는 영업을 마치고 정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싱가포르 달러로 5만4000달러(약 4380만원)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환전 기록을 보니 우리 돈 500만원을 받아 싱가포르 달러로 6000달러를 바꿔줬다고 돼 있었다. 실제로는 그 10배인 6만달러가 출금됐다는 의미였다. 싱가포르 달러는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화처럼 환전 요구가 많지 않은 화폐였다.
정씨는 이날 싱가포르화 6000달러를 바꿔간 사업가 L씨를 기억해냈다. 동료 직원들과 은행 CCTV를 돌려본 정씨는 뭐가 잘못됐는지 이내 깨달았다. 주황색인 100달러가 아니라 보라색에 가까운 1000달러짜리를 들고 있는 본인의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지폐 계수기 숫자가 '60'을 가리키는 장면도 확인했다. 100달러 대신 1000달러 지폐 60장이 그렇게 L씨의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정씨의 연락을 받고 이날 늦게 은행으로 찾아온 L씨는 그러나 "금시초문"이라며 6만달러를 받아간 사실을 부인했다. 싱가포르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것으로 전해진 L씨는 "나는 내가 요구한 6000달러만 바꿔 갔을 뿐"이라며 "환전 과정에서 여러 번 확인을 했을 텐데 은행에서 몰랐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은행 직원 정씨가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L씨는 "환전한 돈을 흰 봉투에 넣어 가방 앞주머니에 보관했는데 잃어버렸다"며 경찰에 분실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근처 파출소를 찾아갔지만, 경찰도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사건을 접수한 서울 강남경찰서는 은행원 정씨와 사업가 L씨를 한 차례씩 불러 조사했다고 11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CCTV 영상 등 여러 상황을 종합했을 때, L씨에게 6만달러가 잘못 지급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고 말했다. L씨가 환전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진짜 몰랐을 가능성도 작다는 게 경찰의 분석이다.
실제로 당시 은행 CCTV에는 L씨가 환전받은 뒤 싱가포르 달러가 든 봉투를 열어 보는 장면이 포착됐다. 자신이 바꾸려 한 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봉투에 담겼다는 걸 환전 당시든 정씨와의 통화 이후든 L씨는 알았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싱가포르를 오가는 사업가라면 100달러와 1000달러 차이를 잘 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L씨가 "진짜 몰랐다. 그리고 돈을 잃어버렸다"고 부인하고 있어 이를 반박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경찰은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하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CCTV 등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 증거만으로도 L씨가 환전이 잘못된 사실을 알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이 경우 L씨에게 사기 혐의를 적용해 형사입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만에 하나 L씨가 환전에 착오가 있었다는 걸 몰랐고 진짜 돈을 잃어버렸다 해도 은행 측은 민사소송을 통해 L씨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한다.
돈의 행방을 두고 진실게임이 벌어지면서, 은행원 정씨는 사비로 모자란 금액을 메워 정산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은행의 한 직원은 "정산 과정에서 직원들의 과실 때문에 모자라는 소액을 사비로 낸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큰 액수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입력 2015.03.12. 05:47업데이트 2015.03.1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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