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10] 예비군의 48년 친구 '카빈 소총', 대형 총기 범죄에도 단골 등장

입력 2015.03.11 03:00 | 수정 2015.03.11 07:52

광복 이후 터진 대형 총기 사건 중 피해 규모로 보면 경관이 하룻밤 사이 주민 56명을 사살한 1982년 4월의 '의령 총기 난동'이 최악이었다. 사회적 충격파가 컸던 사건으로는 1974년의 '이종대·문도석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불우하게 자란 두 남자는 2년간 3만여 경찰의 추적을 따돌린 채 총기 살인과 강도를 저질렀다. 둘은 경찰에 포위되자 아내와 자녀를 모두 사살하고 자살했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최인호 소설 '지구인', 이장호 감독의 영화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와 연극 '등신과 머저리'가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져 '우리 사회가 괴물을 키운 것은 아닌가' 돌아봤다.

향토예비군의 무기로 48년간 사용되다 퇴역하는 카빈 소총(위)과 1974년 살인 강도 범인 이종대·문도석이 사용한 ‘개머리판 없는 카빈 소총’.

두 대형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범행에 쓴 총이 모두 '카빈 소총'이라는 사실이다. 정식 명칭은 'M1 카빈(carbine)'. 1941년 태어난 미군 소총이 어쩌다 한국 범죄의 수단이 됐을까. 1968년 창설된 '향토예비군'의 기본 무기가 되면서 관리가 허술해진 게 원인이었다. 1968년 4월의 예비군 창설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은 카빈 소총을 예비군에게 지급하라고 직접 지시했다(조선일보 1968년 2월 18일자). 미국으로부터 100만정 이상 공여받아 물량도 풍부했다. 길이가 90.4㎝로 M1 소총보다 19.6㎝나 작으며 무게도 가벼워 우리 체격에 딱 맞았다. 이후 48년간 예비군들은 2차 대전 때 소총으로 훈련했다. 하도 낡아 사격 도중 총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불렀지만, 이 총은 가장 많은 한국 남자가 쏜 총이 됐다. 전국사격대회에는 '예비군 카빈 소총' 부문도 만들어졌다(1971년 9월 30일자).

그러나 군·경 무기고에 비해 취약한 예비군 무기고의 카빈 소총은 범죄자들의 표적이 됐다. 1971년에는 17세·18세의 강원도 청소년 2명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2 자루를 훔쳐 한밤 서울 시내 다방에서 난사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이들은 "서울 사람들은 잘사는데 우리만 산골에 묻혀 고생한다"며 경찰관 등 2명을 사살하고 영등포 일대를 공포의 천지로 만들었다(1971년 8월 19일자). 카빈 소총의 개머리판을 자르면 휴대가 더 쉬워졌다. '개머리판 없는 카빈소총'은 1970년대 전후 강도 사건마다 등장하는 흉총(凶銃)이 됐다.

숱한 역사를 남긴 카빈 소총이 한국인들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됐다. 국방부는 3월부터 모든 예비군 훈련 때 카빈 소총 사용을 중단하고 M-16 소총을 지급하며, 예비군 무기고의 카빈 소총도 내년까지 모두 M-16으로 교체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고색창연한 나무 개머리판을 만지며 시간 여행 하던 한국 남자들의 추억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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