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트 美대사 테러] 2007년 訪北뒤 극단 행동… 청와대 앞 분신(2007년)·김정일 분향소 설치 시도(2011년)

입력 2015.03.06 03:00 | 수정 2015.03.06 10:08

[범인 김기종은 누구]

'종북 콘서트' 황선이 理事인 親北 '주권방송' 창립 발기인
DJ·盧정부때 민주평통 위원, 통일부서 교육위원 위촉도
5년 전엔 日대사에 '돌멩이'… 이번엔 "韓美훈련 중단"

리퍼트 미 대사에게 흉기 테러를 자행한 김기종(55)씨는 NL(민족해방)계 노동문화운동단체 '우리마당 통일문화연구소' 소장이다. 1984년 서울 유명 사립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사법시험 준비를 접고 풍물 등을 보급하는 이 단체를 세웠다. 1997년에는 서울시민문화단체연석회의, 1998년 우리마당 통일문화연구소, 2006년 우리마당 독도 지킴이라는 단체를 차례로 만들었다. 1997년부터 10여년간은 성공회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지냈다.

김씨가 주한 외교 사절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7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강연회 도중 시게이에 도시노리 당시 일본 대사에게 독도 문제를 항의하며 콘크리트 파편 2개를 던졌다. 법원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북한은 당시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그를 지지했다. 김씨는 2년 뒤인 2012년 8월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이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 독도를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작년에는 이 사건 내용을 담아 '독도와 우리, 그리고 2010년'이라는 책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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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를 습격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가 경찰에 연행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김씨는 체포될 때도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고 소리치며 소란을 부렸다. /뉴시스
[뉴스 9] 뼛속까지 北 주장과 닮은 김기종 TV조선 바로가기
'재야 문화 활동가'로 불렸던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제도권에 진입했다. 2001∼2003년, 2005∼2007년 민주평통 지역위원을 지냈다. 노무현 정권 때였던 2005년부터는 통일부가 임명하는 통일교육위원으로 4년간 학생·시민들에게 강연도 했다.

그의 한 대학 동문은 "(김씨는) 20년 전부터 반미·반일·친북 성향이 강했던 주사파"라며 "2006년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할 때 본적을 독도로 옮기며 일본 규탄 운동을 하더니 북한에 다녀온 뒤부턴 본격적으로 반미 운동에 나섰다"고 했다. 김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민족화합운동연합'이라는 단체 소속으로 8차례 방북했다. 개성에 나무를 심는다는 명목이었다.

방북 이후부터 김씨의 활동은 극단으로 흘렀다. 2007년 10월 청와대 앞에서 분신을 시도해 화상을 입었다. 우리마당 회원들이 괴한들에게 습격당한 1988년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였다. 김씨 측 변호를 맡은 이가 당시 노무현 변호사였다. 김씨는 "담당 변호사가 대통령이 돼도 사건 해결이 안 된다"면서 몸에 불을 붙였다.

김기종 약력 정리 표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광우병 촛불 시위와 용산 참사 관련 정부 규탄 시위에 앞장섰다. 이후 반미·친북 색채가 더욱 짙어져, 2010년 천안함 폭침 땐 "남북 공동 조사를 하자"고 주장한 데 이어 종북(從北) 인사 황선씨가 현재 이사로 있는 주권방송 창립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 2월부터는 우리마당 통일연구소를 통해 매달 토론회를 열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고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며 북한 주장을 답습하는 듯한 반미론(論)을 설파했다.

김씨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려다 보수단체와 충돌했다. 2013년 4월부터는 옛 통합진보당, 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등과 함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을 꾸려 활동했다.

김씨는 이번 사건을 저지른 뒤에도 "이산가족이 못 만나는 이유는 전쟁 훈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범행 후 "미국에 경종을 울리려 한 것이지 대사 개인에게 감정은 없다. 상처가 그렇게 깊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김씨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며 가족과 전화 통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친동생은 "2007년 분신 사건 때 간병한 뒤부터 연락을 끊고 살았다"고 했다. 그는 "형이 사회운동이란 걸 한다면서 과격해졌다"며 "가족 중 누구도 형의 뜻이나 활동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이웃 김모(35)씨는 "늘 비슷한 개량한복 차림으로 다녔고, 인사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고 했고, 다른 주민 문모(69)씨는 "대학 졸업 후 집안 재산을 시민운동 하는 데 다 쓰고, 지금은 월세도 못 내는 형편이라 들었다"면서 "예전에 이웃들에게 미국을 비판하는 책을 선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돼 한 달에 약 40만원씩 받아왔고, 가끔 우리마당 회원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생활비에 보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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