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95/FIRST & BEST] 현존 最古 민간신문 조선일보… 日帝에 강제 폐간 수난, 70年代부터 '부동의 1위'

    입력 : 2015.03.05 03:00 | 수정 : 2015.03.05 15:24

    창간호 배달원들 방울 달고 뛰어… 당시 本紙는 문인들의 고향
    1933년 방응모 사장이 인수 후 6만부 찍으며 최고신문에 올랐다
    광복 후 찾아온 5년 만의 복간… 방응모 사장은 눈물을 흘리며
    창고에 넣어둔 字母부터 꺼내… 좌·우익 모두 復刊을 축하했다
    '4·18 고대생 습격' 사진 특종… 5·16 당시엔 '쿠데타' 용어 고집
    '신문 컬러 인쇄' 선도하고 각종 기획으로 언론 선두 자리매김

    ■ 本紙, 창간~강제폐간

    "조선일보 창간요! 조선일보가 나왔습니다."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朝鮮日報) 제호가 씌어 있는 저고리를 입은 젊은 배달원들은 서울 곳곳을 달리며 조선일보 창간 사실을 알렸다. 배달원이 입은 옷에는 방울 네 개가 달려 있어 신문을 들고 뛸 때마다 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창간호가 나온 날은 봄날답지 않게 추운 날씨였다. 당시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경성(서울) 하늘은 반쯤 구름으로 덮였고 기온은 영하 6.1도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언론 암흑 10년을 깨고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우리 신문 '조선일보'를 받아든 조선 민중의 가슴은 뜨거웠다.

    조선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항일 기사와 논설을 잇달아 실어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194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모두 471차례 압수당하는 수난이 이어졌다. 창간 직후 한 달 넘게 휴간에 들어간 조선일보는 4월 28일 낸 4호 신문으로 첫 압수를 당했다. 조선 왕세자 이은(李垠)이 일본 왕족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와 결혼하면서 먼저 혼약을 맺었던 민(閔) 규수가 강제 파혼당했다는 기사였다.

    6월 1일부터 10일까지 연재한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 기획은 총독부를 경악시켰다. 첫 회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恨)'은 1년 전 3·1운동 당시 일제 탄압의 잔학상을 폭로했다. 9회 '일본 군국주의와 조선족'에서는 '왜놈'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총과 칼로써 조선 민족을 쓸어 죽이려 한다'고 일제 통치를 질타했다. 이 기사들의 내용은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격문에 가까웠다.

    1924년 조선일보는 전면적 혁신을 통해 '조선 민족의 신문'으로 다시 도약했다. 이해 9월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받던 이상재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조선 민중으로부터 최고로 존경받던 민족 지도자였던 이상재는 "동아일보와 싸우지 말고 합심하여 민족 계몽 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사장 제의를 받아들였다. '혁신 조선일보' 주필에는 안재홍이 초빙됐다. 안재홍은 이후 발행인·부사장·사장을 지내며 약 8년간 조선일보에 재직했다. 그는 이 기간 사설 980편, 시평 470편 등 1450편에 이르는 글을 썼다. 안재홍은 일제강점기 9차례에 걸쳐 7년 3개월간 옥고를 치른 언론인이었다.

    민족 통합과 항일 운동 거점인 신간회의 창설을 주도한 것도 조선일보였다. 발기인 51명 중 12명이 조선일보 사람이었다. 회장을 맡은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을 비롯해 부사장 신석우, 주필 안재홍, 편집국장 한기악, 영업국장 이승복, 지방부장 장지영 등이 주요 간부를 맡았다.

    힘차게 성장한 조선일보 95년 그래픽

    작가 홍명희는 신간회 창립을 계기로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었다. 신간회 부회장에 추대된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의 동생 홍성희는 1930년대 조선일보 판매부장을 지냈고, 장남 홍기문은 조사부장·학예부장·논설위원을 거치며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는 문인들의 고향이었다. 이광수·현진건·염상섭·김동환·심훈·이육사·김동인·채만식·백석·김기림 등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문인들이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식민지 민중의 애환을 달래고 우리말을 갈고 닦았다. 이육사(본명 이원록)와 그의 동생 이원조·이원창 3형제는 모두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단재 신채호는 1931년부터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 문화사'를 모두 144회 연재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1933년 경영난과 내부 분란으로 표류하던 조선일보를 평안도 정주의 '금광왕' 방응모(方應謨)가 인수하면서 조선일보는 중흥을 맞았다.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민족 지도자 조만식은 방응모에게 조선일보 인수를 권유했다. 방응모는 금광 청산 대금 중 50만원을 조선일보에 납입했다. 당시 잡지 '삼천리'는 1933년 10월호에서 '오늘날 조선의 신문 사업은 아직까지 소모 사업에 속한다. 이와 같이 영리사업이 아닌 기관에 50만금씩 던지는 분이 있다면 그는 존경에 값하는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민족사학자 문일평이 조선일보에 합류한 것도 이때였다. 그가 남긴 한국사 관련 방대한 글은 거의 모두 조선일보 지면에 쓴 것이다. 그는 편집고문으로 재직하며 사설도 집필했다.

    방응모 인수 이후 조선일보는 최고 신문으로 부상했다. 1933년 조선일보 부수는 2만9341부로 동아일보(4만9945부)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지만 3년 뒤 6만626부로 동아일보(3만1666부)의 두 배 가깝게 성장했다. 이런 성장은 조선일보가 주도한 사업과 기획 기사 덕분이었다. 조선일보는 1934년 문자 보급 운동을 재개하면서 한글 교재 100만부를 배포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당시 조선일보 부수가 5만8000부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이해 7월 영남과 호남 지역에 폭우가 쏟아져 사상 최대 수해를 입었을 때 조선일보는 언론 사상 처음으로 비행기를 띄워 취재 및 지원 활동에 나섰다. 당시 화제가 된 취재용 비행기는 프랑스제 살무손 2A2형이었다. 조선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본사는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보도의 천직을 다하기 위해 거대한 비용을 들여 최후 수단인 비행기를 출동시키기로 결의했다'고 알렸다.

    본지 95년사 언론 최초 기록들 그래픽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참가한 손기정이 출전하기 전날 조선일보는 한국 언론 사상 첫 국제전화 취재를 했다. '손군이오? 전 조선이 한 가지로 듣고 싶어 하는 손군의 이야기를 듣고자 전화를 걸었소.' '네 고맙습니다. 뭐 이렇게 먼 데서 전화까지 걸어주세요.' 당시 동경에서 베를린까지 3분 통화는 100원으로 기자 월급의 두 배였다. 손기정은 이날 9분간 통화에서 동포들의 기대에 전력을 다하겠으며 조선에서 보내준 고추장과 마늘장아찌를 먹고 힘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창간 이래 20년 5개월 5일 동안 수많은 정간과 압수, 발매 금지와 삭제를 당하면서도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조선일보는 1940년 8월 강제 폐간을 당한다. 폐간호는 8월 11일자 지령 6923호였다. 1939년 11월부터 '삼국지'를 연재 중이던 한용운은 조선일보 강제 폐간에 울분을 토하며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漢詩)를 썼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絶筆墨飛白日休)/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銜枚人散古城秋)/ 한강물도 울음 삼켜 흐느끼며(漢江之水亦嗚咽)/ 연지(硯池)를 외면한 채 바다로 흐르느니!(不入硯池向海流).'

    ① 1924년 10월 13일자에 실린 첫 4컷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② 1925년 1월 6일 한강에서 열린 제1회 조선빙상대회 경기 모습. ③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폐간호 마지막 배달을 마치고 경성(서울)의 배달원 및 배달 감독들이 본사 계단에서 고별 촬영을 했다.
    ① 1924년 10월 13일자에 실린 첫 4컷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② 1925년 1월 6일 한강에서 열린 제1회 조선빙상대회 경기 모습. ③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폐간호 마지막 배달을 마치고 경성(서울)의 배달원 및 배달 감독들이 본사 계단에서 고별 촬영을 했다. / 조선일보 DB

    ■ 本紙, 복간~오늘 현재

    1940년 8월 10일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윤전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임직원들이 5년 3개월 13일 만에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된 것이었다.

    광복이 되자마자 방응모는 조선일보 복간에 최우선 과제를 두었다. 폐간 당시 의정부 자택 창고에 보관해놓았던 자모(字母)가 잘 있는지부터 챙겼다. 자모는 활자를 주조할 때 자면(字面)을 만드는 모형틀이다. 폐간 당시 복간을 확신했던 방응모는 윤전기와 활자를 빼앗기면서도 자모만은 보관해놓았다.

    옛 조선일보 사원 20여명이 방응모의 복간 의지를 듣고 의정부 자택에 모여든 건 9월 말이었다. 방응모와 조선일보 편집위는 미군정 당국이 접수해서 운영하던 매일신보의 인쇄 시설을 이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당시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서울신문 11월 23일자가 발행되던 날, 조선일보 기사를 담은 윤전기도 돌아갔다. 폐간호에 '폐간에 제(際)하여'를 썼던 방응모는 복간호 1면 좌측 가운데에 '복간에 際하여'를 실었다.

    광복 직후의 정치 지도자들도 좌우 이념 구분을 떠나 조선일보 복간을 축하했다. 이승만은 "금일 우리의 위급한 이 시기에 조선일보가 다시 부활하여 출세(出世)됨을 한없이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축하했다.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이라고 조선일보 복간 축하 휘호를 썼다.

    좌익 진영도 조선일보 복간을 환영했다.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은 당을 대표해서 "일본제국주의의 철쇄(鐵鎖·쇠사슬)에 얽매여 있던 조선일보가 다시 나오게 된 것은 귀보(貴報)의 긴 역사를 잘 아는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라며 "조선일보가 전통 있는 그 본령(本領)을 충분히 발휘할 것으로 크게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고 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극에 달했던 당시 조선일보는 중도통합 노선을 견지했다.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은 1946년 1월 4일자 지면을 통해 조선일보의 기본 방향을 밝히는 글을 게재했다. "솔직히 나 개인의 경우를 말한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임시정부를 지지한다 해서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나처럼 임정 지지를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인민공화국에 반대하지만 나와는 반대로 인공(人共)을 지지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당분간 완전 자주독립국가가 설 때까지 나 개인의 고집인 임시정부 지지를 보류하고 오로지 통일국가 건설에 매진할 생각이다."

    복간 직후부터 조선일보는 적극적으로 친일 청산을 주창했다. 1948년 8월 17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 상정됐을 때도 사설을 통해 "친일 분자들을 엄중히 처벌해야 하며 일제시대 관료는 신(新)정부 관료 임용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듬해 1월부터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자, 조선일보는 2면 머리기사 자리를 대부분 반민특위 활동 보도에 할애했다. 사실상의 고정란이었다.

    ④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 ⑤ 1988년 9월 27일 서울올림픽 육상 100m 경기에서 9초79의 기록으로 우승한 벤 존슨의 약물 복용 보도는 세계적 특종이었다.
    ④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 ⑤ 1988년 9월 27일 서울올림픽 육상 100m 경기에서 9초79의 기록으로 우승한 벤 존슨의 약물 복용 보도는 세계적 특종이었다. / 조선일보 DB

    1950년 6·25전쟁 발발로 조선일보도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6월 27일까지 발행되던 신문은 북한군의 서울 점령으로 발간이 중단됐다. 방응모 사장은 7월 6일 납북됐다. 우여곡절 끝에 10월 23일자 속간호를 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이듬해 1월 3일자까지밖에 내지 못했다.

    1·4후퇴로 피란했던 조선일보 사원 40여명은 부산에 모여 신문 발행을 결의했다. 이때부터 방응모 사장의 손자 방일영(方一榮)은 신문 제작에 본격 참여했다. 전시에도 조선일보는 전쟁 중에 헤어진 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보육원에 수용된 아이들 900명의 명단을 게재했다. 최초의 '이산가족 찾기' 기획이었다.

    1950년대 조선일보는 이승만의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는 민권운동의 선봉에 섰다. 1954년 집권 자유당이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重任) 제한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자, 조선일보는 지면을 통해 비판했을 뿐 아니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개헌안 토론대회를 개최해 개헌 반대론을 이끌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2500명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인 뒤 학교로 돌아가던 중에 종로4가에서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날 피습 현장을 다음 날 유일하게 사진으로 보도한 신문이 조선일보였다. 이 사진 한 장은 4월 19일 전국 대학생들을 궐기시킨 기폭제가 됐다. 조선일보는 4·19 당일 석간에서 국내 신문 사상 가장 큰 제목 크기로 '전대학생(全大學生)이 총궐기(總蹶起)'라고 보도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날 조선일보 석간 1면의 제목은 '만세! 민권(民權)은 이겼다!'였다.

    이듬해 5월 16일 박정희 당시 소장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날 석간 조선일보 1면 제목은 '군부 쿠데타 군사혁명위 조직을 발표'였다. 이미 계엄령이 내려져 엄격한 사전 검열이 실시되고 있었지만, 조선일보는 '쿠데타'라는 용어를 고집했다. 군부의 검열은 강화됐다. 5월 17일 조선일보 석간은 사설을 제외하고 1면 머리기사부터 제목은 물론 기사의 주요 부분이 삭제돼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이날 검열로 삭제된 기사는 8건이었다. 당시 언론인들은 자조적으로 이런 신문을 '벽돌 신문'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는 컬러 신문 시대였다. 1970년 2월 11일 방우영(方又榮) 대표가 윤전기 시동 버튼을 누르자, 다채로운 색깔의 신문이 쏟아졌다.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컬러 신문 인쇄였다. 눈에 띄는 특집으로 승부하는 '기획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1970~1976년 조선일보의 '세계 10대 컬러 기행'은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기획이었다. 1000년 전 신라 고승 혜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신(新)왕오천축국전'을 필두로 인도 불교 성지 기행, 한국 최초의 실크로드 횡단 르포인 '서역 삼만리'가 차례로 연재됐다. TV도 흑백이던 시절에 화려한 컬러 사진을 통해 세계의 구석구석을 독자들에게 전달한 기획은 조선일보가 '1등 신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일보의 기획력은 1995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자'는 정보화 캠페인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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