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95/FIRST & BEST] 기억하십니까, 대한민국의 위대한 첫 걸음

  •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부 교수

    입력 : 2015.03.05 03:00 | 수정 : 2015.03.05 07:56

    시작은 미약했지만…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비전과 의지로 未來를 열었다

    에디슨이 발명한 탄소필라멘트 전구가 가로등으로 설치돼 뉴욕의 밤거리를 밝히기 시작한 것은 1882년이었다. 그해 미국과 수교한 조선은 이듬해 민영익·홍영식 등을 보빙사(報聘使)로 임명해 미국으로 파견했다. 조선이 서양으로 파견한 외교 사절 제1호였다.

    샌프란시스코·워싱턴·뉴욕·보스턴 등을 시찰한 민영익 일행은 궁궐에 전등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1884년 9월 에디슨 컴퍼니와 전등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순조롭게 계획이 추진되었다면, 조선은 미국보다 2~3년 늦게 전등을 도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해 12월 갑신정변이 발발해 실제로 건청궁에 전등이 설치된 것은 1887년 봄이었다. 뉴욕보다 5년 남짓 늦었지만, 현재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뒤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7년 12월에는 조선 제1호 전기 회사인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다. 1899년 서울을 동서(본선)와 남북(용산선)으로 잇는 전차 2개 선이 개통됐고, 1900년에는 서대문과 남대문을 잇는 전차 노선(의주선)이, 종로에는 가로등 3개가 설치됐다. 그러나 한성전기회사는 미국의 자본과 기술에만 의지한 나머지, 얼마 못 가 경영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 일한와사(瓦斯·가스)주식회사로 개편됐다.

    이렇듯 조선은 근대적 제도와 문물의 도입은 늦었지만, 역설적으로 '이권'을 노린 열강의 다툼 속에서 전기·철도·항만 등 근대적 국가 시설 건설 자체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근대적 과업을 수행하겠다는 비전과 의지가 부족했고, 그것을 주도할 인재를 양성하지 못해 근대화에 실패하고 결국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제1호'는 구한말 근대화 과정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등장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일시에 빠져나간 데다가 정부 조직이건 산업체건 고위직으로서 의사 결정 경험이 있는 한국인은 얼마 없었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 선뜻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국가도 없어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지해 근근이 버텨나가는 처지였다. 분단과 6·25전쟁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한의 '단독 총선'에 항의하며 송전을 중단했다. 당시 수풍수력발전소를 비롯해 대부분의 발전소는 북한에 있었다. 남한은 전력 수요량의 60% 정도를 북한에서 공급받고 있었다. 대한민국 제1호 발전소 '목포 중유발전소'는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건설되었다. 1948년 12월 민간 기업이던 남선전기주식회사가 원조 자금으로 기공한 목포 중유발전소는 5000㎾ 용량으로 오늘날로 보면 약 2000가구 정도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소규모 발전소였다. 그마저도 완공된 지 1년 만인 1950년 7월 6·25전쟁 와중에 폭격으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전소를 건설해 1964년 4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제한 송전이 사라졌다. 7년여의 공사 끝에 1978년 4월 고리원자력 1호기가 완공되며 '원전 시대'를 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영광도 있다. 전자·자동차 등 각 분야의 ‘대한민국 제1호’는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제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영광도 있다. 전자·자동차 등 각 분야의 ‘대한민국 제1호’는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제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①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내놓은 TV ‘VD-191’(1966년·왼쪽)과 LG전자의 첨단 ‘올레드 TV’. ②삼성전자의 첫 휴대폰 ‘SH-100’(1988년·왼쪽) 개발 역량은 스마트폰 ‘갤럭시S6’로 이어졌다. ③1896년 포목점 ‘박승직 상점(왼쪽)’으로 출발한 국내 최고(最古) 기업 두산은 중공업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두산그룹 본사. ④현대차는 국산 고유 모델 1호인 ‘포니’(1975년·왼쪽)를 거쳐 고급 세단 ‘제네시스’로 세계를 호령한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가장 품질이 좋고 값싼 전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데에는 1954년 4월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국제원자력학교에 첫 국비 원자력 연구요원으로 파견된 윤세원·김희규 등 '원자력 유학 1호'의 역할이 컸다. 외환은 단돈 10달러를 쓸 때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야 했던 시절, 이승만 정부는 10개월 연수 기간 1인당 학비가 6000달러나 드는 '원자력 유학생'을 4년간 8차에 걸쳐 150여 명이나 내보냈다.

    어느 분야든 '대한민국 제1호'의 첫걸음은 한없이 미약했다. 1955년 8월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은 국산 자동차 제1호 '시발(始發)'을 출시했다. 엔진과 변속기는 미군이 사용하던 지프형 차의 부품을 활용하고, 차체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만든 6인승 지프형 승용차였다. 국산 흑백 TV 1호인 금성사 'VD-191' 500대가 출시된 것은 국영 KBS TV가 개국한 지 5년여가 지난 1966년 8월이었다. 'TV 같은 사치품을 만들 부품을 수입하기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외화를 낭비한다'는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금성사는 'TV 부품 도입에 소요되는 외화는 라디오를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를 활용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걸어 부품 수입 허가를 받았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제1호들' 덕분에 현재 대한민국은 반도체·조선·휴대전화·자동차·제철·정유·화학공업 등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됐다. 산업 분야에서 시작된 세계시장 경쟁력은 2000년대 이후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산업 영역으로 확대됐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세계시장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뚜렷한 비전과 의지,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수많은 인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한 분야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김치, 막걸리 등 한국 고유의 일부 먹거리를 제외하면 '대한민국 제1호'가 세계인의 식생활과 문화를 풍요롭게 한 '세계 제1호'로 발돋움한 예는 아직 많지 않다. 한국의 지난 100년이 앞선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갔던 시기였다면, 향후 100년은 수많은 '세계 제1호'를 탄생시키는 시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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