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가사도우미

입력 2015.02.26 03:00

쉰 살 김해영씨는 척추 장애인이다. 키가 134㎝다. 정신 질환을 앓는 엄마 대신 동생 넷을 키우려 열네 살부터 식모살이를 했다. 중학교 간 친구의 영어 교과서가 부러워 월급 3만원에서 얼마를 떼 '영어 완전 정복'을 샀다. 독학하는 틈틈이 편물 기술을 배웠고 세계장애인기능대회 금메달까지 땄다. 남의 집 살이에서 벗어났지만 보수 높은 직장 대신 아프리카 최빈국 보츠와나로 떠났다. "세상은 내게 좌절을 권했지만 나는 희망을 쏘아올리고 싶었다"고 했다. 14년간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친 뒤 미국 명문 컬럼비아대에 입학했다. 지금도 저개발 국가를 다니며 국제사회복지사로 일한다.

▶'식모'는 1970년대 문학의 단골 소재였다. 돈 벌러 무작정 상경한 시골 여인들이 식모로 쏟아져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김씨처럼 인간 승리를 이룬 경우는 소설에서조차 찾기 힘들다. 최일남의 '가을나들이', 전상국의 '전야', 박완서의 '창밖은 봄',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에 등장하는 식모들은 하나같이 불행했다. 오창은 중앙대 교수는 식모를 '근대적 경제 시스템에 착취당한 전(前)근대적 존재'로 규정했다.

만물상 칼럼 일러스트

▶식모들은 파트타임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일을 했고 노동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고용주 집을 감옥으로 여겼다. 박완서 소설 '친절한 복희씨'의 열아홉 살 복희처럼 집주인 성폭력에도 무방비로 노출됐다. 주인집 패물이 없어지면 맨 먼저 의심받았다. 경찰이 '식모 신상 조사'를 할 정도였다.

▶한데 세상이 변했다. 호칭부터 가정부·가정관리사·파출부로 바뀌다 가사도우미로 격상됐다. 이르면 내년부터 4대 보험 혜택에 퇴직금과 근로장려금도 받을 수 있단다. 노조에 들거나 노조를 만들 수도 있다니 30만 가사도우미가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는 정식 직업으로 등극한 셈이다. '부엌데기'들의 하찮은 일로 여겨온 가사 노동 가치를 국가가 인정했다는 점에선 매우 반가운 일이다. 호칭은 달라졌어도 여전히 노동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실효성이다. 정부가 정한 가사도우미 역할은 청소·설거지·세탁·다림질·요리에 한정된다. 아이를 돌보거나 간병을 받으려면 도우미를 따로 구해야 한다. 시간당 비용도 높아져 가사도우미가 절실한 맞벌이 가정의 경제적 부담도 커진다. 근로 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일주일도 안 돼 그만두는 도우미가 많아 주인이 '상전' 모시듯 눈치 보는 게 현실이다. 또 하나 거대한 불법 노동시장을 만들어내지 않으려면 법 시행 이전에 꼼꼼한 시뮬레이션을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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