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강인선 LIVE] 착한役 맡다가 착한 일에 빠진 '국민 아버지'

    입력 : 2015.02.14 03:04 | 수정 : 2015.02.23 16:55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국후원회장 탤런트 최불암

    30년째 계속된 후원
    드라마 인기로 후원 나서… 영향력 생기니 계속 지원
    미더운 아버지 이미지가 내게 좋은 일 할 기회 줘

    '좋은 사람' 부담감도
    방송서 금연행사하면서 "금연" 말한 후 잊어버려
    식당서 피우다 지적당해… 그 자리서 담배 끊었다

    "아버지 모르고 컸지만, 그 그리움으로 아버지 느낌을 만들었다"

    평생 연기하며 살다보니… 함께 대화하는 사람 삶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하는 시각이 생겨

    배우가 사는 이유… 시인은 詩만 먹 듯
    배우는 박수만 먹고 살아야 그 외 것은 먹으면 안돼

    원래 연출가가 꿈
    대학시절 연극서클하면서 후배들 연기지도 하는데
    교수가 "네가 하라" 해… 그 역으로 賞까지 탔다

    신중년女 데이트 상대 1위
    신문기사 보고 창피해서 와이프에 말도 못하다가
    "좋은 기사 났네" 반응에 얼굴이 후끈후끈하더라

    "창살 없는 감옥이었지. 내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는 중국으로 가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인쇄소에 일을 하러 다녔어. 어머니는 어린 나를 방에 혼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갔지. 방엔 밥과 요강과 그림 그릴 종이가 있었어. 어머니가 가고 나면 친구들이 찾아왔는데 나는 못 나가니까 한지 바른 문의 찢어진 틈으로 밖에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놀았어.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속에 눈물이 흘러. 아마 그때 내가 배우가 됐을 거야. 빈방에서 혼자 엄마도 되고 아버지도 되고…. 혼자 연극 같은 것을 했어. 그리운 아버지….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잘 몰라. 아버지라고 불러본 것도 다 합해봐야 두 번 정도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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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최불암은 30년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전국후원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장애를 가진 한국 아이가 미국의 한 가정에 입양된 걸 보고 ‘오랫동안 후원회장을 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고 말했다. 그는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 지나가다 그를 알아보고 멈춰선 사람들에게 “허허, 안녕하세요” “어이구, 먼저 지나가쇼” 라며 말을 걸었다. / 이태경 기자

    '한국의 아버지 상(像)'을 대표하는 배우 최불암(75)의 기억 속에 정작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과 부인을 인천에 남겨두고 중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최불암이 일곱 살 되던 해 귀국해 인천에서 신문사와 영화사를 차렸다. 뒤늦게 그의 인생에 등장한 아버지는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양복을 빼입고 와주었고 아들이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미제(美製) 과자'도 사다줬다. 하지만 그가 막 아버지의 존재에 익숙해질 무렵 아버지는 35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수우(愁雨)'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나서 시사회를 코앞에 두고 과로로 쓰러졌다. 나는 아버지의 영정을 안고 첫 시사회에 갔다. 눈물의 시사회였다."

    최불암은 지난 10일 부스스한 머리에 검은 외투를 입고 서울 신문로의 한 카페로 들어섰다. 친숙한 얼굴과 목소리, 그 뒤로 구부정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사람들은 왜 최불암을 보면 아버지를 떠올릴까.

    "이상하게도 여자건 남자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면 서슴없이 '우리 아버지 같다'고들 한다. 이유가 딱히 없다. 뭔지 모르게 똑같다고들 한다. 등 뒤에서 아버지를 느꼈다고도 하고. 내 등이 그들의 아버지처럼 외롭고 고독해 보이나? 아버지의 마음이란 해석할 수 없는 시(詩)가 마음에 쓰여 있는 것과 같은 거다. 아버지는 외로운 거지."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아버지의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었나.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거지. 그리움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한국의 아버지'는 어떤 느낌을 줘야 할까.

    "투박하고 질박한 도기 그릇처럼 든든하고, 보이지 않는 눈물도 있고."

    ―'눈물의 시사회' 기억 때문에 영화보다는 TV드라마에 더 애정을 기울였나.

    "그건 아니다. 우선 영화보다는 연극이나 드라마 쪽이 내게 더 맞았다. 게다가 나는 드라마 '수사반장'(1971~1989)과 '전원일기'(1989~2002)를 오랫동안 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했다. 월급쟁이처럼 산 거다. 그에 비하면 그때 영화계는 몹시 어려웠다. 내가 영화 쪽에까지 가서 돈 벌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1980년대부터 딱 접은 것이다. 친한 사람들이 부탁해서 예외적으로 몇 편 한 경우는 있어도."

    ―불암(佛岩)이란 이름이 특이하다.

    "내 원래 이름은 최영한(崔英漢)이다. 아버지가 35세에 돌아가시고 난 후 큰아버지가 내 이름이 명이 짧다면서 새로 불암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하지만 이름이 이상한 것 같아서 쓰지 않았다. 국립극단 단원이 됐을 때 극장에서 포스터를 만드는데 이름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이 똑같은 이름이 두 개 나가면 이상하니 혹시 다른 이름 없느냐고 묻더라. 그때 생각난 게 '불암'이었다. 그후 최불암이 됐는데 놀림도 받고 고생도 좀 했지만 이름 덕도 많이 봤다. 불암산에 가면 내 시비(詩碑)가 있을 정도니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최불암의 어머니는 서울로 가서 명동에 '은성(銀星)'이란 술집을 열었다. 1955년 봄이었다. 그곳은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의 아지트였다. 박인환, 김수영, 천상병 같은 문인과 화가 김환기, 유명 언론인들의 단골집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외갓집에 맡겨 놓고 장사를 했다. 가게에는 발을 못 들여놓게 했다. 어쩌다 들르면 어머니가 가게에서 나온 담배꽁초를 자루에 담아 줬다. 외할아버지 갖다 드리라고. 버스에서 자루가 터져 담배꽁초가 우르르 바닥에 쏟아지면 그걸 다시 쓸어담느라 종점까지 가기도 했다."

    1970년대 명동이 재개발되면서 은성은 문을 닫았다. 그는 어려웠던 젊은 시절을 '술집 하던 홀어머니의 외아들'이란 말로 요약한다.

    신중년 여성들이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

    ―한국의 60~75세 여성들이 데이트하고 싶은 남성 1위가 최불암이었다. 조선일보와 '선우' 부설 '결혼문화연구소'가 신(新)중년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이다. 나이 지긋하고 푸근한 느낌의 남성들이 인기였다는데.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고 창피해서 와이프에게 말도 못했다.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을 슬쩍 덮어놨다. 집사람(배우 김민자씨)이 알면 섭섭할 수도 있으니까. 집사람이 신문을 넘기기에 얼른 '거기 내 기사 있어'라고 했다. 와이프가 '어머, 좋은 기사 났네' 하는데 얼굴이 후끈후끈하더라."

    ―그래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던가.

    "배우는 인기를 먹고 사는 거니까. 나를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라고 생각해준다면 좋은 거다. 나름 분석을 해봤더니, 그동안 잘해왔나 보다, 미운털이 박힌 건 아닌가 보다 싶었다. 더 열심히 봉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남자의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은 인상을 주게 된 비결이 무엇일까.

    "어느 날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만났는데 '지게는 어떻게 지는가'라고 묻더라. 대답을 못 하니까 '목의 힘으로 지는 거다'라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진짜 농부는 목이 늙는다는 것을. 전원일기에서 농부인 척하고 살았어도 사실은 헛방이었던 거다. 좋은 인상이란 다 배우 최불암이 만들어낸 인간일 뿐 내 본래의 것은 없다. 나는 좋은 탈을 많이 써봤을 뿐이다. 실상은 보통사람인 거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전국후원회장으로 활동한 지 올해로 30년 됐다. 처음 시작할 땐 30년 계속하리라고 예상하진 않았을 텐데.

    "그냥 한번 지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 '전원일기'에 출연하며 인기가 있었으니 어렵게 지내는 어린이를 돕는 일을 했던 건데 영향력이 생기니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난 30년의 세월은 내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나를 살린 거다."

    1981년 드라마 '전원일기' 속 김 회장은 장에 갔다가 구걸하고 있던 금동이란 아이를 데려온다. 깨끗하게 씻겨 밥이라도 먹여 보낼 생각이었는데 동네에선 금동이가 김 회장이 딴 데서 낳아온 아이라고 수군수군한다. 결국 김 회장이 금동이를 입양하기로 했다. 드라마 속 김 회장이 한 일인데 배우 최불암에게 잘했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방송국 전화에 불이 났고, 편지는 배낭에 담아 옮겨야 할 정도로 밀려들었다. 방송국에서 야근하던 사람들이 밤새도록 걸려오는 전화에 잠을 못 잤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다.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 실제로 한 일도 아닌데 칭찬받으니 마음이 불편했을 것 같다.

    "나는 작가가 써준 대사를 가지고 놀았을 뿐인데 나 보고 잘했다고 하니까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그때만 해도 시청자들이 그렇게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에 '수사반장'에 출연할 때는 남편이 바람피운다고 해결해달라고 찾아오는 여자분도 있었다. 주변에 이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어린이재단을 통해 한 아이를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렇게 후원금을 내게 됐다."

    더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부담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과 달리 전국 후원회장을 맡는 건 책임이 따르는 일일 것이다.

     [Why] [강인선 LIVE]
    손바닥만 한 수첩 앞부분엔 빼곡하게 적힌 그의 일정이, 뒷부분에는 펜으로 꾹꾹 눌러쓴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담겼다. “나보고 노인네라고나 그러겠지 뭐. 나는 완전 아날로그야.” 이런 것까지 보여줘야 하느냐며 멋쩍어하던 그는 결국 수첩을 펼쳐보였다. / 이태경 기자

    "엉뚱하게 내가 칭찬받은 게 미안하기도 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사명감도 느끼던 차에 기독교아동복리회(CCF) 초청으로 미국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에 간 일이 있다. 거기서 한국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집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 기관들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불쌍한 아이들을 돕는 걸 보고 도대체 당신들은 이런 걸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신앙이냐, 아니다. 그럼 휴머니즘이냐, 아니다. 그럼 교육이냐,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뭐냐고 하니, '너 같은 사람 덕이다'라고 하는 거다. 나 같은 배우가 미국의 정신을 만들어줬다고 했다. 존 웨인이나 게리 쿠퍼 같은 배우가 되라고 격려해주더라. 내가 어떤 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배우가 되라는 것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1948년 기독교아동복리회(CCF)에서 출발한 아동복지 전문기관이다. 1980년대 중반 외국 원조가 거의 사라지고 국내 후원금 모금이 중요해졌다. 그때부터 최씨가 전국 후원회장을 맡았다. 현재 후원자는 약 28만6000명이다. 후원받는 어린이는 국내 2만6000명, 해외 2만4000명 정도 된다. 지난해 이 재단이 모은 후원금은 약 1140억원이었다.

    ―스스로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쉽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사실 나는 별로 한 일이 없다. 일은 1000명에 달하는 어린이재단 직원이 한다. 나는 그저 어디서 좋은 일 한다고 하면 가서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수금하는 거지. 하하…. 내가 후원회장을 하는 건 일종의 재능기부라고 보면 된다."

    ―좋은 일을 함으로써 더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부담도 있을 것 같다.

    "부담된다. 한번은 방송프로그램에서 금연 관련 행사를 하다가 별생각 없이 나도 금연하겠노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곤 잊어버렸다. 그후 어느 식당에서 밥 먹고 담배를 피우는데 어떤 분이 금연하겠다더니 왜 담배 피우느냐고 묻더라. 그 자리에서 당장 담배를 끊었다. 무단횡단하다가 택시 기사분에게 걸린 일도 있다. 지나가다 차를 세우고 횡단보도도 없는 데서 왜 길 건너느냐고 야단치시더라. 어딜 가나 보는 사람이 있으니 늘 조심한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될 것 같다.

    "구태여 좋은 사람으로 보일 것까진 없지만 만나는 분들에게 다 응답해주는 게 어렵다.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인터넷에 띄우시니까. 한번은 장갑을 끼고 있다가 미처 벗을 시간이 없어 그대로 악수했는데 그걸 지적하는 글이 올라오더라. 그래서 아무리 추워도 장갑은 안 끼려고 한다. 그분들도 내 체온을 느껴보고 싶어서 악수하자고 하시는 거니까."

    연기에 경지가 어디 있나

    ―배우 한 지 50년쯤 됐으면 이제 '연기의 신(神)' 경지에 오르지 않았을까.

    "경지가 어디 있나. 숙달됐다곤 할 수 있겠지. 요즘과 비교하면 옛날엔 연기하는 게 식은 죽 먹기였다. 요즘 시청자들, 얼마나 까다로운가. 다음에 나올 대사 다 알고, 그다음 장면이 어떨지도 다 안다. 시청자들이 앞서가는 거다. 게다가 카메라의 정밀도는 얼마나 높은가. 잘못하면 이빨 사이 고춧가루 다 보이고, 입 냄새까지 전달될 것 같다."

    ―기술 발달이 배우에겐 부담인 셈이다.

    "카메라가 워낙 발달하니까 속마음까지 전달될 것 같은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쁜 사람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최고인 것 같았는데, 이젠 얼굴 가지고도 안 된다. 요즘 카메라는 배우의 의식이나 속마음까지 다 전달할 정도로 정밀하게 보여준다. 이젠 배우가 얼굴이나 몸만으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해야 한다."

    ―배우들은 나이 들면 대사 외우는 일이 점점 힘들다고 하던데.

    "내가 워낙 대사를 못 외운다. 억지로 하긴 하는데, 요즘 작가들은 까다로워서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싫어한다. 옛날엔 안 그랬지만 NG를 많이 내니까 부담되고 후배들 앞에서 창피하기도 해서 요즘은 기억력이 좀 좋아진다는 약을 먹는다."

    ―연극은 배우의 것이고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고 하지 않나.

    "맞는 얘기다. 연극은 그래서 더 매력이 있다. 창의력이나 기운의 분배가 굉장하다. 그리고 관객과 진심이 통한다. 내가 이쪽에서 아~ 하면 저쪽에서도 아~ 한다. 무언의 소통이랄까. 이 관계가 기가 막힌다. 연극만큼은 아니지만 드라마도 연극적 요소가 있어서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는 배우의 연기력보다는 감독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전원일기 김 회장과 수사반장의 박 반장 중에 어떤 게 배우로서 더 중요했나.

    "수사반장이다. 내가 주인공이니까. 수사반장은 배우들이 실제로 현장에 나가서 수사하는 과정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때 경찰이 조언을 해줬는데 새벽 3시고 2시고 사건이 나면 나오라고 했다. 초동수사 한 이후에 우리가 현장에 가봤다. 수사반장은 지금 생각해도 참 근사한 드라마였다."

    배우는 박수를 먹고 산다

    ―배우를 오래 하면 보통 사람들과 달라지는 점이 있나.

    "사람을 보는 눈이 좀 다른 거 같다. 저 사람은 뭐 하나가 빠졌구나, 더 있구나, 이런 게 보인다. 집사람이 당신은 사람 참 잘 본다고 한다. 그 사람이 태어난 시대, 살아온 과정 이런 걸 보는 건데, 이 사람은 가짜로구나. 이 사람은 진짜구나, 그런 느낌을 알겠더라."

    ―같은 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람들이 나를 닮고 싶어지는 그런 연기를 해야 한다. 영화를 보면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드는 연기 말이다. 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공동체 의식도 좀 가져야 한다."

    ―배우는 무엇으로 사나.

    "배우는 박수를 먹고 살고 시인은 시(詩)만 먹고 살고 누에는 뽕잎 먹고 사는 게 원칙이지. 배우는 박수만 먹고 살아야 한다. 그 외의 것은 먹으면 안 된다."

    ―원래 배우가 되려고 했나.

    "연출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 시절 연극 서클을 하면서 후배들 연기 지도를 하는데 다들 노인 연기를 너무 못해서 야단을 치는데 교수가 차라리 네가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역으로 상을 탔다. 배우가 되려고 한 게 아니라 '땜빵'을 하다가 그렇게 된 거다. 그후부턴 여기저기 다니면서 노역(老役)하고 그랬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셨다. 3대를 망해 먹을 놈이라면서…."

    ―요즘 젊은 연예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예쁘고 잘생긴 사람만 사람이 아니다. 좀 부족하게 생기고 그런 사람도 방송에 나와야 한다. 요즘 방송엔 예쁜 사람만 나오니까 할아버지 아버지도 잘 안 나온다. 드라마가 '사람 놀이'가 되면 안 된다. 배우란 진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권유로 정치에도 발을 들여놨었다.

    "정 회장이 참 잘해주셨는데 결국 국회의원을 만드시더라. 내겐 나라 운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내 전공인 문화예술이 국민에게 중요한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 그걸 기준으로 일했다. 하지만 선거에 나갔다가 지고 난 후엔 더 큰 정치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배우로서 더 좋은 인간상을 만들면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살려고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불암은 예술가인가.

    "예술을 하고 싶어했지."

    ―'나는 예술가다'란 답이 선뜻 안 나오는 모양이다.

    "대중과 동떨어진 예술보다는 대중예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중예술을 한다는 건 너무 많이 노출되고 너무 가까이 있으니까 선뜻 예술을 한다고 할 수 없는 거다. 화가 이중섭처럼 불행한 그림을 안고 죽는 것, 그게 진짜 예술가다. 견디고 참아야 인생의 맛이 있는 거고, 참고 견디는 것이 예술인데 난 그러지 못하고 쉽게 갔으니 미안하다. 그래서 쉽게 예술가라고 할 수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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