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오늘 5월 러시아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전승절)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정황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사 참석 여부를 놓고 우리 외교 당국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의 방러 문제는 남북 관계뿐 아니라, 미·중·일·러 등 주변 4강(强)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북 '김일성 해외 순방 축하 노래' 틀어

북한 조선중앙TV는 11일 김일성이 1984년 5~7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를 방문하던 시기에 자주 틀었던 '원수님 먼 길 다녀오셨습니다'라는 노래를 30년 만에 다시 방영했다. 이 노래는 전체 북한 주민이 김일성과 마음을 함께하고 만수무강을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다.

북한이 이 노래를 다시 튼 것은 러시아 방문 결심을 굳힌 김정은이 사전에 분위기를 잡기 위한 목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북한은 아이들이 먼저 노래를 부르게 해 분위기를 띄운 뒤 어른들이 따라 부르게 하는 방식으로 정치 선동을 한다"며 "이번에도 30년 전과 같이 아이들을 통해 김정은의 국제 무대 데뷔를 축하하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 같다"고 했다.

북한이 김정은의 전용기로 쓸 수 있는 새 여객기를 도입하기로 한 것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12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우크라이나 안토노프사가 2월 중순 'An-148' 여객기를 북한 고려항공에 인계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An-148' 여객기는 2009년에 취역한 새 기종으로, 김정은이 전용기로 이용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정보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4강 이해관계 얽혀 골치 아픈 정부

러시아 방문을 둘러싼 우리 정부의 고민은 훨씬 복잡하다. 전승절 흥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러시아는 지난 8일 한·러 외교장관 회담에서 "박 대통령의 참석을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 백악관은 10일 바로 박 대통령의 방러에 부정적인 태도를 밝혔다. 우리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끼여버린 셈이다.

정치권에서는 "대러 관계뿐 아니라 남북 관계를 위해서도 박 대통령이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박 대통령이 전승절 행사에서 김정은과 자연스럽게 만나 남북 관계 전환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일각에선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려 박 대통령이 들러리로 밀려날 수 있다"거나 "남북 관계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부담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초청장 때문에 머리가 깨질 지경"이라며 "참석을 하면 한·미 관계에 상처가 날 수 있고, 참석을 안 하면 남북 관계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 방문 여부가 중국 '항일(抗日)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9월 3일) 참석과 연결된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박 대통령에게 "중국의 '항일전 승리 70주년'과 한국의 '광복 7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할 정도로 이 행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김흥규 아주대 교수는 "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간다면, 중국 행사에도 안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행사가 일본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박 대통령이 이 행사에서 시 주석과 손을 맞잡는다면 한·일 관계 개선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한·미·일 공조'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 역시 한국의 참석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