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9일로 예정된 러시아의 70주년 전승절(戰勝節)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는 문제를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9일 박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에 대해 "개별 국가들이 스스로 판단하겠지만 미국의 동맹이란 차원에서 보면 (한·미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전 개입에 반대한다는 데서)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러시아에 가서는 안 된다고 공개 주문한 셈이다.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안보 동맹국이다. 두 나라는 주요 국제 현안에서 입장을 같이해 왔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우크라이나 내전(內戰)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러시아에 대한 국제 제재를 이끌고 있다. 이런 미국 측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박 대통령의 정상(頂上) 외교에 대해 미국 정부 관계자가 공개석상에서 가타부타 간섭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외교적 무례(無禮)다.

러시아는 박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우크라이나 문제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러시아는 작년 11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최룡해 노동당 비서를 초청했다. 그러고선 김정은의 전승절 행사 참석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거듭 박 대통령의 참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북은 이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 10일 국회 외통위 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미국 눈치를 볼 게 아니라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해 남북대화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잘못됐다. 김정은은 올 신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내비쳤지만 정작 한·미 합동 훈련 중단 같은 엉뚱한 조건을 내걸면서 남북대화 자체에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김정은이 모스크바에 간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설혹 간다 해도 남북 정상이 전승절 같은 행사에서 잠깐 조우(遭遇)하는 것이 남북 관계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김정은을 만나기 위해 국제사회가 등을 돌린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우리의 국격(國格)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이다.

2차대전 종전(終戰) 70년을 맞아 중국도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 중이고, 역시 한국의 참석을 요청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행사는 자칫 반일(反日) 국제 연대처럼 비칠 수 있다. 2차대전 종전의 의미는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 일련의 행사에 대처하는 일관된 기준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주변 강국들의 요구에 원칙 있게 대응하면서 외교적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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