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난 '명절 장국영'

조선일보
  • 김승준·성우
  • 김도원
입력 2015.02.10 03:00

김승준씨 사진
김승준·성우
브래드 피트, 조니 뎁, 크리스천 베일, 고(故) 장국영…. 외국 영화 더빙 시, 내가 전담해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그래서 '전담 배우'라 한다. 해당 배우의 원래 목소리, 분위기 등을 고려해 정한다.

특히 장국영을 잊을 수 없다. 1993년 경극(京劇)을 다룬 영화 '패왕별희'를 녹음할 때였다. 당시 신인이었던 내게 주인공 장국영 역할을 맡겨준 것만으로도 파격이었는데, 하늘 같은 선배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잘해내고 싶었다. 러닝타임만 170분인 영화를 30번 넘게 봤다. 워낙 기대작이었기에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인공의 첫마디. 이 첫 단추를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갈린다. "22년이야. 22년…." 아련한 첫마디였다.

녹음 당일, 컨디션은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영화가 워낙 길다 보니 오후 3시에 시작된 녹음이 밤 10시가 되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혼신의 내공을 모두 쏟아낼 '인민재판' 신(scene)만 남겨뒀다. 문화대혁명의 불길 속에서 경극을 구시대 잔재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랜 친구들이 서로를 헐뜯고 파괴한다. 배신감에 인생의 환멸을 폭발시키는 장면이다. 역할상 여성 톤의 목소리를 유지해야 하기에 혼자서 100번도 넘게 연습했다. 간신히 녹음을 마쳤는데, 감독이 "한 번만 더 다시 가자"고 했다. 전체 연기의 합(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두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영화를 마치니 자정이 넘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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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달력을 보니, 설이 코앞이다. 명절, TV 앞에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외화를 보다 잠들던 기억이 난다. 성우들끼리 '명절 성우'라는 말을 한다. 명절에 가장 바빠지는 성우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번엔 누구의 목소리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길까.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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