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이층 6·25실에 빛바랜 태극기가 걸려 있다. 먹을 갈아 쓴 한자 구호가 여백에 빼곡하다. '우국(憂國) 애족정신, 공산군 타도, 조국애(愛), 애국혼(魂)….' 1950년 9월 6일 도쿄 사는 재일동포 학생 스무 명이 한 줄씩 썼다. 이들은 남침한 북한군에게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렸다는 소식을 듣고 민단(民團) 사무실에 모였다. "나라를 잃으면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며 당장 고국으로 가자고 했다.

▶일본 곳곳에서 1000명 넘는 젊은이가 참전을 지원했다. 오사카 사는 조만철은 집안 종손이었다. 일주일 곡기를 끊고서야 허락받고 집을 나섰다. 규슈의 신효근은 외아들이어서 차마 말을 못 꺼냈다. 아버지가 배앓이를 하자 의사에게 수면제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버지 깨어나면 말씀해달라 부탁하고 떠났다. 오사카 동포 신문 '신세계' 기자 김성욱은 참전 행렬을 취재하다 자원했다. 열아홉 살 고교생부터 642명이 신체검사를 거쳐 뽑혔다.

▶한국이 일본과 국교를 맺기 전이어서 젊은이들은 도쿄 미군 극동사령부로 갔다. 거기서도 손을 내젓자 시위를 하고 혈서를 썼다. 구령·경례·제식 훈련만 나흘 받고 9월 12일 1진이 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배 안에서 소총 다루는 법을 배웠다. 인천상륙작전 이틀 뒤 인천 땅을 밟았다. 재일 의용군은 여러 차례로 나눠 미군과 한국군에 배속됐다. 52명이 전사하고 83명이 실종됐다.

▶265명은 순환 배치되는 미군을 따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은 주권을 되찾자 '허가받지 않은 출국자'라며 나머지 의용군 귀환을 막았다. 242명이 가족과 떨어져 부산과 서울을 떠돌았다. 병적 기록이 거의 없어 '유령부대' 얘기까지 듣다 1967년에야 존재를 인정받았다. 전사자는 현충원에 묻혔고 여러 곳에 기념비가 섰다. 다달이 연금도 나온다.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해외 유학생들이 귀국한 일화는 애국심의 상징처럼 돼 있다. 재일 의용군은 그보다 17년 앞서 조국의 전쟁터로 달려갔다. 병역 의무도 없었다. 정부가 엊그제 도쿄에서 노병(老兵)들에게 호국영웅기장을 달아줬다. 이젠 살아 계신 이가 두 나라에 서른 명도 안 된다. 이분들이 여전히 서운해하는 것이 있다. 국민이 이스라엘 유학생 이야기는 잘 알면서 재일 의용군에 대해선 어두운 현실이다. 여론조사에서 '외국 있을 때 전쟁 나면 귀국하겠다'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된다. 나라 위해 희생한 이가 두루 존경받아야 여느 국민도 기꺼이 몸바치겠다는 마음이 우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