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체제 전환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오치르바트 전 대통령은 "사람들의 지문(指紋)이 다 다르듯 개개인의 생각과 욕구는 다 다르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한 사람의 결정에 모든 사람이 따르도록 하는 시스템에서는 발전이 있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이 같은 고민 때문에 일시적인 사회 혼란을 감수하더라도 기득권을 포기하고 빠른 속도로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 1인당 국민소득이 300달러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4000달러가 넘는다"고 했다. 이어 "물론 아직도 가난한 사람이 많고 실업문제도 있지만, GDP의 85%가 민간 부문에서 창출될 만큼 시장경제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면서 "당시 결정을 후회한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고 했다.
―70년간 이어진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몽골은 대내외적으로 큰 변화에 직면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구(舊)소련에 커다란 변화가 일자 몽골은 경제 기반이 와해될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또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 국민의 억눌려온 욕구가 분출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삶의 질을 높이려는 욕망은 어떤 억압으로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점진적인 체제 전환이 아닌 급진적인 방식을 택했는데.
"소비에트식 일당 지배와 중앙 계획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존 체제의 '카타르시스적 붕괴'가 필요하다는 게 당시 지도부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호흡법, 손·발 동작을 하나하나 가르치기보다 그냥 물에 던져버리는 충격 요법을 썼을 때 수영을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공감대 속에서 기업 사유화와 소비자 물품 자유화, 수입 관세 인하 등을 빠르게 밀어붙였다."
―그런 식의 충격 요법은 혼란을 불러올 수 있지 않나.
"초창기에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빈부 격차 등 부작용이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이런 부작용은 체제 전환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것이다. 우리는 긴 행복을 위해 짧은 고통을 선택했다."
―급진적 체제 전환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반발이 있었을 텐데.
"1990년 울란바토르 중심의 수흐바타르광장에서 민주화 운동가 10명이 단식을 시작했고, 3일 후에 (집권 공산당인) 인민혁명당 정치상임위원들(지도부)이 사퇴했다. 이 과정에서 어떠한 유혈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다. 기득권층은 속으로야 여러 생각을 했겠지만, 이런 변화의 흐름에 반발해서 얻을 게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북한도 몽골처럼 체제 전환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보나.
"북한 주민들이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과거보다 더 많이 얻고 있다. 이에 따라 자유와 사적 소유에 대한 욕구가 확산되고 있음을 북한 지도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지도자들이 이른 시일 내에 생각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몽골은 체제 전환 전부터 '외세 침략에 대한 방어'보다 '경제성장'이 제1목표였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 등 외세에 맞선다면서 무기 개발을 제일 목표로 두고 있다.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이런 이념을 걷어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북한의 체제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몽골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나.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이 1988년 몽골을 방문했을 때 난 경제 부처 장관으로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석탄 광산 사업 투자 논의를 상당히 긴밀하게 했었다. 이런 인연이 있는 만큼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만날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내 경험을 빌려 그에게 '국민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면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야 한다'는 점을 꼭 말하고 싶다. 특히 나라의 안보는 핵무기가 아닌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총을 서로 겨눌 때 전쟁이 나는 것이지, 총을 버리고 나오면 협력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몽골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