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에 사는 홍현서(15)군은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다. 저시력증이었다. 책을 좋아했던 홍군은 침침한 눈을 비비며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곤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림프암이 발병했다. 희미했던 오른쪽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책 읽기는 더 어려워졌지만 홍군은 영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서 동생과 함께 영어 공부를 했다. 한 페이지 읽는 데 10분이 걸리지만 한 시간 넘게 책을 놓지 않는다.
올 들어 홍군은 영어 공부에 더 신바람이 났다. 서강대에서 지난 22일부터 9박 10일간 열리는 시각 장애 학생 영어 캠프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홍군은 "그동안 일반인과 공부하기엔 벅찬 점이 많았는데,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돼 아주 편하다"고 했다.
국내에서 시각 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캠프를 진행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올해는 시각 장애 중·고교생 42명이 참가했다. 캠프를 후원하는 정인욱복지재단 관계자는 "시각 장애 학생들은 능력이 있어도 대부분 직업이 안마사로 국한된다"며 "세계무대에서도 통하는 리더로 성장할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 캠프를 열었다"고 했다.
25일 영어 캠프의 영작 시간. 학생 7명 중 4명의 책상 위에는 공책, 필기도구 대신 시각 장애인용 점자 정보 단말기인 '한소네'(단말기 자판을 두드리면 흰색 점자가 입력되고 이를 일반 문서 파일로도 변환할 수 있는 단말기)가 놓여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에 관해 10문장 이상 영작을 해보라"는 과제를 받은 학생들은 한참을 고민하다 탁탁탁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눈이 보이는 학생은 프린트물에 인쇄된 큰 알파벳을 코앞으로 끌어당겨 한 자 한 자 읽었다. "My favorite TV show is 슈퍼맨이 돌아왔다. 대한·민국·만세 are so cute….(제가 가장 좋아하는 TV쇼는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프로그램입니다. 거기 나오는 대한·민국·만세 세 쌍둥이가 귀엽습니다.)"
두 눈 시력을 완전히 잃은 김한나(16)양이 점자 판을 능숙하게 훑으며 발표를 이어나갔다. 발표에 나선 다른 여학생은 띄엄띄엄 점자 문장을 손으로 찾아 읽는 데 30초가 넘게 걸렸다. 학생들과 선생님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곳에서 교사들은 촉각·청각 등을 최대한 활용해 영어를 설명한다. touch(만지다)와 tap(두드리다)의 차이점을 설명하며 직접 학생 어깨를 두드리는 식이다.
더듬더듬 알파벳을 읽어가며 아이들은 꿈을 키워 갔다. 법조인을 꿈꾸는 정승원(15)군은 "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는 읽기가 느려 좀처럼 발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며 "이곳에서는 모두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기 때문에 용기도 낼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캠프에서 서로의 눈과 손발이 되어 갔다. 전맹인 최은지양이 저시력인 홍현서군에게 칠판에 쓰인 'dangerous(위험한)' 등의 단어를 읽어 달라고 하자 홍군이 칠판에 바짝 붙어 서서 천천히 단어를 읽어줬다. 2012년부터 줄곧 캠프에 참가한 교사 제임스 찬씨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어 퀴즈를 하면 일반 학생들은 계속 손을 들며 실력을 뽐내듯 경쟁해요. 하지만 이 아이들은 한 문제를 맞히면 다른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잠시 기다려줘요. 오히려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