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베프(베스트 프렌드)·狂클(미친듯이 클릭)·멘붕(멘탈 mental 붕괴)… 탈북자들 "외래어·줄임말 몰라 말이 안 통해요"

    입력 : 2015.01.17 03:00

    분명히 우리말인데…
    한국에 온 탈북자들 “외래어 섞인 대화는 못 알아들어 괴로워요”

    영어에 발목 잡혀
    北 영어교육 거의 全無 대학 들어가도 못따라가… 취업의 가장 큰 걸림돌

    진짜 필요한 도움
    英문화원·물망초학교, 탈북자들에 영어 교육
    중고생 모임 ‘웨이브’는 신조어 책자 만들어 전달

    탈북자 김한주(가명·맨 왼쪽)씨와 전금주씨, 권새별씨가 영국문화원에서 외국인 강사(오른쪽에서 둘째)와 함께 영어 수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외래어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한 문장마다 2~3개씩 모르는 말이 등장했다”고 했다.
    탈북자 김한주(가명·맨 왼쪽)씨와 전금주씨, 권새별씨가 영국문화원에서 외국인 강사(오른쪽에서 둘째)와 함께 영어 수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외래어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한 문장마다 2~3개씩 모르는 말이 등장했다”고 했다. /이덕훈 기자

    지난 13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탈북(脫北) 청소년 대안학교 물망초 학교의 영어 시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 5명과 영어교사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교사가 "요즘 남한에서 '멘붕'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 뜻 아는 사람"이라고 묻자 "몰라요"라는 합창이 돌아왔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을 때, 멘털(mental)이 붕괴했다는 말로 쓰여. 알겠지."

    하지만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멘털은 무슨 뜻이에요?" 교사는 "그건 '정신의' '마음의'라는 뜻이야. 결국 멘붕은 마음이 붕괴됐다, 충격을 받았다 그런 뜻인 거지"라고 대답했다.

    학생들은 평소에 자주 들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단어가 나올 때마다 "이제 알겠다"는 듯 환하게 웃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수업을 진행한 박민 교사는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에 정착할 때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이 바로 언어 문제"라며 "그들에겐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영어나 외래어를 배우는 일이 공부를 넘어 생존을 좌우할 만큼 절박한 문제"라고 말했다.

    남북이 분단된지 70년이 되면서, 남북한이 같은 말을 쓰는데도 탈북자들은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탈북자들에겐 일상적으로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남한 사람들의 말이 이해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어려움이 단지 소통이 힘든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 시원하게 의사소통이 안 되니 아르바이트도, 취업도, 대학 생활도, 사업도 어려워진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5월 기준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2만6711명이다. 이 중 69.8%인 1만8663명이 10~30대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도록 하려면 언어 문제를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우리말인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지난 2008년 한국에 온 탈북자 권새별(25)씨는 "남한에 온 후 첫 2년 정도는 정말 지옥 같았다"고 했다. 주변 친구들이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아르바이트도 고역이었다. 그는 "친구가 칭찬으로 '너는 생긴 게 엘리트 같아'라고 해도 그게 욕인지 뭔지 구별이 안 됐다"며 "아르바이트할 땐 대화에 자신이 없어 주방 설거지를 했는데 '키친타월' '쿠킹호일' 같은 용어를 못 알아들어 불호령이 떨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2010년 9월 한국에 온 전금주(29)씨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영어로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좋은 성분 출신으로 교육도 잘 받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 오자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영어와 외래어에 그만 주눅이 들어버렸다. "냅킨 달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몇번이나 '네?' 하고 되물었어요. 나중에 그게 식탁 휴지라고 하더라고요. 사람들한테 물어보기는 부끄럽고…" 전씨는 2013년 11월부터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영국 문화원에 가서 영어 공부를 하고있다.

    지난해 4월 통일부가 최근 10년 동안 입국한 20~60세 탈북자 32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외래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41.4%, 115명)가 꼽혔다. '가장 듣고 싶은 문화 강좌'는 '언어'(24.4%)라고 답했다. 탈북자들은 "같은 민족, 같은 말인데 어떻게 이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지…"라고 입을 모은다.

    탈북자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은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면 19세기에서 21세기에 툭 떨어진 것 같은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며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직 희미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어에 뒤섞인 영어 단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어려움에 그치지 않는다. 얼어붙은 취업 시장에서 탈북자들의 발목을 잡는 족쇄다. 함께하는재단 탈북민취업지원센터가 지난해 8월 탈북 대학생 10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이 중 73.5%가 "토익, 토플 등 공인 영어점수가 없다"고 답했다. 영어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영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변변한 직장 하나 얻기 힘들다.

    학생들에겐 국어, 사회, 역사 등의 과목을 공부할 때도 외래어와 영어는 엄청난 절벽이다. 김지수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은 "간신히 대학에 들어가도 언어 때문에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 중도 탈락하는 학생이 수두룩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용운 겨레말큰사전 편찬실장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외래어만 2만4019개인데 북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외국어도 많이 쓰이고 있어 탈북자들이 우리 대화를 알아듣기 어렵다"고 말했다.

    북한 영어 교육은 있으나 마나

    북한에서도 공식적으론 영어 교육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영어를 제대로 공부했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비행기 승무원조차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일 영국의 항공사·공항 서비스 평가 기관 스카이트랙스(Skytrax)가 세계 600여 항공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북한 고려항공이 '4년 연속 세계 꼴찌'로 선정됐다. 기내식, 발권 서비스 등과 더불어 승무원의 영어 실력 항목에서 별 5개 만점에 최하위인 별 1개를 받았다.

    통일부가 발간한 '2014 북한 이해'에 따르면 북한은 2008년 9월부터 소학교 3년 이상 학생들에게 영어 교육을 하고 있다. 영어 수업은 일주일에 1시간이다. 이마저도 대도시 몇 곳을 빼곤 학교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이라 제대로 된 학습이 이뤄지지 않는다. 탈북자들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북한의 공교육은 완전히 붕괴됐다. 학교를 아예 가보지 못한 학생이 천지다"라고 말했다. 물망초학교에서 영어 강의 자원봉사를 하는 레이첼 스타인(24)씨는 "평양에서 먼 지역 출신일수록 학교에 다녀본 적 없다는 학생이 많다더라"고 말했다.

    탈북자 영어 교육에 나선 사람들

    지난해 10월 영국 BBC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 100대 여성'에 '박연미'라는 이름이 올랐다. 박씨는 지난해 9월 아일랜드에서 열린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에서 유창한 영어로 "탈북하면서 어머니가 나를 지키기 위해 중국인 브로커에게 성폭행당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숨만 죽이고 있었다. 중국이 탈북자 강제 북송 정책을 중단하도록 힘써달라"고 호소했다. BBC는 박씨를 "북한 주민들이 겪는 고난을 알리는 사회활동가"라고 소개했다.

    박씨 역시 처음에는 A, B, C 정도만 겨우 아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에게 영어 선생님을 소개해준 사람이 케이시 라티그 프리덤팩토리 국제협력실장이었다. 2010년 한국에 온 라티그는 탈북자에게 영어 선생님을 연결해주는 프로그램(TNKR)을 운영하면서 물망초학교에 영어 강의를 가는 봉사자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탈북자 영어 교육을 돕는 외국인은 최근 1~2년 사이 부쩍 늘었다. 라티그 실장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외국인만 200여명이 넘는다. 이들에게 영어를 배운 탈북자는 150여명이다. 라티그는 "북한 사람들은 영어에 대해선 백지상태와 같다"며 "탈북자가 영어를 잘하면 끔찍한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릴 기회가 많아진다"고 말했다.

    영국 대사관은 2011년부터 영국문화원의 영어 강의 지원, 영국 어학연수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 탈북자 어학 공부를 돕고 있다. 지금까지 150여명이 영국문화원에서 영어 수업을 받았고, 11명이 영국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알리스다 워커 주한 영국 대사관 정치참사관은 "한국에서는 일상생활에서나 취업에서 영어가 매우 중요한데 탈북자들이 영어를 배울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아 영어 학습 프로그램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탈북자 단체나 대안학교 등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중고등학생들도 이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다. 중고생 30여명으로 구성된, 북한 사회를 알리기 위한 청소년 모임 웨이브(W.A.V.E.)는 지난해 2월 '10대 청소년, 그들만의 라이브(Live) 언어'라는 소책자를 발간, 이를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에 전달했다. 책에는 '베프'(Best Friend·가장 친한 친구의 줄임말), 'plz'(please의 줄임말), '광클'(狂+click·미치도록 클릭함) 등 남한 청소년들이 자주 사용하는 외래어와 영어, 신조어가 정리돼 있다.

    하지만 일부 사회 성원의 힘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의지를 갖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탈북자 단체 관계자는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정부의 적응 교육 시스템이 너무 부실하다. 마치 한겨울에 벌거벗겨진 채 광야에 내쫓기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통일 시대를 대비한다면 언어 문제에 대한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해결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은 "통일부 등이 주축이 돼 탈북 청소년들이 있는 기관에 원어민 영어 교사를 보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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