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 아래서 새해 아침을 맞았다. 그해 8월 15일 정오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세계대전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다. 이 나라 강토는 "대한독립 만세" 환호 소리에 파묻혔다. 나라와 민족이 광복(光復)을 맞은 것이다.
네 번의 결정적 선택
그 후 이 땅에서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은 광복 70년의 세월 동안 건국(建國)과 6·25전쟁,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최소한 네 번에 걸쳐 현명한 선택을 했다. 첫 선택은 건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루어졌다.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각 분할 통치하는 상황에서 한때 신탁통치가 시도됐고, 좌우(左右) 갈등은 숱한 정치 테러 사건을 낳았다. 그러나 우리는 독립국가 건설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1948년 광복 3년 만에 탄생했다. 비록 남북 분단(分斷)이라는 비극을 맞았지만 적어도 남쪽만은 자유민주주의와 공화정을 헌정(憲政)의 기본 틀로 삼는 결정을 내렸다.
두 번째 선택은 6·25전쟁을 치르면서 이뤄졌다. 3년에 걸친 전쟁에서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세계로 변할 수 있는 위기가 최소한 두 차례 이상 닥쳤다. 그러나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공산화(共産化)를 막아냈다. 자유민주체제를 지켜낸 것이다. 세 번째 결정적인 선택은 한국식 개혁·개방 정책이었다. 5·16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은 수출 주도의 공업화를 국가의 핵심 발전 전략으로 설정했다. 이를 통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으며 5000년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온 백성이 굶주림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선택으로는 1960년 4·19 혁명,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시민·학생 시위로 이어져 온 민주화를 꼽을 수 있다. 우리는 풀뿌리 운동을 기반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넓고 크게 확장되는 민주화까지 이뤄냈다. 산업화·민주화의 역정(歷程)에서 아프리카나 중동, 남미 국가들처럼 나라 문을 걸어 잠그는 실수를 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사회 혼란도 장기화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70년의 역사는 경이(驚異)의 기록이다. 일제(日帝)의 수탈과 6·25 전란(戰亂)이 끝난 1953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의 콩고·가봉·가나보다도 뒤처진 나라였다. 그로부터 60년 동안(1954~2013년) 한국은 연평균 7.4%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경제 규모는 1000배 가까이 커졌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2차 대전 종전 후 세계 곳곳에서 탄생한 대부분의 신생국은 아직도 내전(內戰)에 시달리거나 여전히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하고 선진국 문턱에까지 올라선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어디에 내놓아도, 누구에게 보여줘도 자랑할 만한 성공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2015년은 이 놀라운 광복 70년사를 온전히 평가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광복과 함께 닥친 分斷
그러나 네 번에 걸친 우리의 선택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건국과 6·25전쟁은 분단의 아픔을 온 민족에게 안겼다. 북녘의 2500만 민족은 세습 독재정권의 폭정(暴政) 아래서 굶주리고 있다. 대한민국도 고속 경제 성장과 노도(怒濤)와 같던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리더십의 약화, 양극화(兩極化), 지역 간 격차 같은 심각한 성장통(痛)을 겪고 있다. 기적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광복 70년을 그간의 눈부신 성과에 안주하며 혼자 폭죽을 터뜨리는 데서 끝낼 수는 없다. 지금껏 이 나라를 이끌어온 '성공의 줄기세포'를 더 개발해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나머지 절반의 기적을 완성하려면 무엇보다 분단 상황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광복은 북한 동포들까지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이 태어날 때 받아든 인권을 보장받게 되는 바로 그날 온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 1년 '통일이 미래다' 연중(年中) 기획을 통해 통일 준비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노력은 분단이 끝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올해는 2만명을 훌쩍 넘은 탈북(脫北) 새터민들에 대한 따뜻한 지원과 관심을 제안하고 싶다. 많은 새터민이 한국에 들어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안타까운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2만여 탈북자도 품지 못하면서 어떻게 2500만 주민의 마음을 얻어 통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修交 50년 방향 잃은 韓·日 관계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이 세계적·지역적 패권(覇權)을 놓고 서로 부딪치고 힘을 과시하는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현장이다. 미·중은 이미 대한민국의 외교·안보와 관련한 국가적 결정 하나하나를 놓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미·중 각축에 일본까지 뛰어들었다. 일본 아베 내각은 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추(均衡錘)가 중국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우는 것을 절대 좌시하지 않을 태세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정체에 빠져 있던 일본을 일으켜 깨운 것도 중국의 부상(浮上)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대리인'을 자임하며 70년간 일본의 평화체제를 지탱해 온 각종 금기(禁忌)와 기둥들을 하나둘 무너뜨렸다.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광복 70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언제든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의 재등장을 목격하고 있다.
올해는 한·일 국교 수립 50년이 되는 해다. 지금의 한·일 관계는 과연 두 나라가 함께 수교 50년 기념식을 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일본의 과거사 도발이 직접적 원인이지만 한국 외교도 요령부득 그 자체이다. 1880년 이 땅에 소개된 '조선책략'은 구한말(舊韓末) 국권이 넘어갈지 모르는 위기 속에 조선의 외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책자다. 러시아의 남진(南進)에 맞서 중국과 친하고(親中), 일본과 맺고(結日), 미국과 연결(聯美)한다는 외교 구상을 담고 있다.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렀던 이 책의 저자는 청나라 외교관이다. 자국의 외교 구상도 다른 나라로부터 빌려 써야 할 만큼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는 얘기다. 그로부터 13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의 외교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위기 극복의 DNA 되살려야
우리가 나라 밖의 도전을 뛰어넘어 통일로 나아가려면 대한민국의 내부 에너지를 응축(凝縮)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쉽게도 한국 경제는 2011년부터 3%대 성장에 머물고 있다. 올해 전망도 결코 밝지 않다. 이제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의 이익이 커질수록 국민 개개인에게 돌아올 혜택도 함께 늘어날 것이라는 믿음도 무너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공동체와 개인, 기업과 사회 각 구성원 사이를 이어주던 유대와 신뢰의 고리들이 속속 끊어졌다. 사회 전체에 긍정(肯定)의 기운이 사라지고 대신 자기 몫만 주장하는 각자도생의 욕구만 난무하고 있다. 자기 몫의 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재원 마련에 필요한 어떤 부담도 나눠 지려 하지 않는다.
이 내부 갈등의 악순환을 끊고 대한민국을 성숙한 선진국가로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 정치권의 최우선 과제이다. 그러나 1987년 이후 평화적 정권 교체가 여섯 번이나 이루어졌지만 국민을 통합하는 리더십보다는 지역감정과 선심(善心) 공약에 편승해 정권을 차지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 불신은 갈수록 깊어지고 의회 정치에 대한 회의론도 커지고 있다.
광복 70년은 끝없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언제 전쟁이 다시 터질지 모르는 긴장의 세월이기도 했다. 그 숱한 난관과 기회를 뚫고 생존해 온 DNA가 바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의 뼛속에 각인돼 있다. 우리는 나라를 개방해 외부에서 자원과 인재·외자(外資)를 받아들일수록 더 큰 번영을 누렸고,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 나가 더 큰 기회를 잡았다. 지금 대한민국을 향해 던져진 과제들은 결단코 넘어서지 못할 벽은 아니다. 진정한 위기는 우리 스스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진퇴양난이라 여기는 체념과 좌절에 젖어 있다는 데 있다. 이런 부정(否定)의 기운을 털어내는 것이 급선무다.
2015년 새해 아침, 우리는 지나간 70년을 돌아보며 다가오는 70년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반쪽짜리 대한민국을 온전한 자유민주국가로 만들어가야 한다. 분단의 종결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나라를 열면 열수록 더 큰 기적을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비좁은 국토를 더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한민족 모두가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며 진정한 광복의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