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볼링·탁구에 추억의 아이돌까지… 8090문화 전성시대

조선일보
  • 기자 이미지
    입력 2014.12.26 22:22

    1980~90년대 가요·스포츠·미술… 복고열풍 타고 귀환

    볼링펍(pub)·핑퐁펍 등장
    스포츠에 음악·술 접합, 30~50代에 20代까지 몰려
    과거의 단순한 복제 아닌 시대 맞게 변주되고 융합

    산업계, 불황에 뜻밖의 호재
    노래방엔 8090 메들리, 당시 대중가요 틀어주고
    춤추는 클럽들도 성업… 패션계선 그때 스타일 유행

    8090문화, 왜 인기 얻나
    당시 청소년·대학생들이 직장인 되면서 소비 주축
    가장 즐거웠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표출

    클럽을 연상시키는 조명이 비치는 야광 레인에서 야광공으로 볼링을 즐기는 볼링펍.
    1980~90년대 인기 스포츠였던 볼링과 탁구가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펍’(pub)과 결합해 새롭게 탄생했다. 클럽을 연상시키는 조명이 비치는 야광 레인에서 야광공으로 볼링을 즐기는 볼링펍. /이태경 기자
    지난 23일 오후 9시 서울 성수동 볼링펍(pub) 유니온스타. 현란한 조명이 번쩍이고 클럽에서나 나올 법한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때렸다. 볼링장 곳곳에선 '스트라이크' '예!' 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0개 레인(lane)은 빈 곳이 없었다. 주변 테이블에서는 20여명이 순서를 기다렸다. 회사원 윤명국(24)씨는 "이 시간대엔 술을 한잔 더 하거나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는데 가볍게 운동도 하며 맥주도 즐길 수 있어 한 달에 한두번 이곳에 온다"고 했다.

    이곳은 지난해 9월 뷔페식당에서 볼링펍으로 변신했다. '볼링'이라는 한물간 스포츠로 승부를 건다는 게 모험이었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볼링에 음악과 술을 함께하는 '펍'이라는 문화를 접합시킨 것이 주효했다. 홍석구 유니온스타 부장은 "하루 150~200명 정도 손님이 찾아온다"며 "특히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오전 2시까지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다날엔터테인먼트는 지난 8월 매일 아침에 8090 시절 노래 10곡을 선정해 전송해주는 '8090 길보드'라는 뮤직앱을 출시했다.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곳곳엔 룰라·쿨·듀스 등 1980~90년대 활동했던 인기 가수들의 노래를 틀어주고 춤도 출 수 있는 8090 클럽 20여개가 성업 중이다.

    1980~90년대를 휩쓸었던 '8090 문화'가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3~4년 전 '7080' 시절 가요가 인기를 끈 데 이어 이번에는 8090 문화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8090 문화의 컴백(재등장)이 가요는 물론, 패션과 스포츠, 미술 등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1980~90년대는 현대적 의미의 대중문화가 태동하고 뿌리 내린 시기다. 당시에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콘텐츠들은 지금도 여러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다"며 "앞으로 상당 기간 이런 인기몰이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문화의 원형(原型)… 매력은 여전

    고등학교 2학년 김민영양은 지난 3월 친구와 함께 그룹 신화 16주년 콘서트에 다녀왔다. 티켓 한 장 가격은 11만원. 김양은 몇 달 동안 모은 용돈을 모두 쏟아부었다. 신화는 김양이 만 2세이던 1998년 데뷔한 그룹이다. 김양은 "올 들어 신화 팬이 됐다"며 "어렸을 땐 전혀 몰랐던 그룹인데 음악을 들어보니 내 취향에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년 말 8090 시대 대표 아이돌그룹 출신 멤버들이 속속 활동을 재개했다. 문희준·은지원·데니안·천명훈 등 1996~1999년 데뷔해 인기를 끌었던 H.O.T·젝스키스·god·NRG 멤버들이 '핫젝갓알지'라는 이름으로 뭉쳐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었다. 지난 6월 이들이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어 "우리와 추억이 있는 분들은 '좋아요'를 눌러달라"고 하자 6만3372명(24일 현재)이 '좋아요'를 눌렀다.
    맥주를 마시며 탁구를 치는 핑퐁펍.
    맥주를 마시며 탁구를 치는 핑퐁펍. /서울핑퐁펍 제공
    올해 들어서도 이런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한 서태지가 9집 앨범을 들고나왔고, 1999년 데뷔한 god는 그룹이 해체된 지 9년 만에 재결합해 컴백했다. god 콘서트는 예매 시작 30분 만에 표가 매진됐고 전국 콘서트에 팬 11만명이 몰렸다.

    지난 4월 뮤지컬 제작사 '보보스컴퍼니'는 1994년 서울 이태원을 배경으로 당시 인기를 끌었던 클론·룰라·터보 등의 노래 29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문나이트'를 무대에 올렸고, 지난 20일에는 MBC '무한도전'이 1990년대 가수들을 등장시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를 방송해 동시간대 예능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미술계에도 8090 인기가 반영되고 있다. 경주 우양미술관은 지난 11월 28일부터 '백 투 더 8090'전을 열고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호안 미로·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이 1980~90년대에 제작한 작품 40점을 전시하고 있다.

    기업이나 산업계는 불황기에 뜻밖의 호재를 만났다. 노래반주기 제작업체인 금영은 이달 2015년형 최신 모델을 내놓으면서 '8090 메들리' 메뉴를 추가했다. DJ DOC(1994년 데뷔), 터보(1995), BB(1996), R.ef(1995) 등의 노래가 중심이다. 방종철 금영 홍보팀장은 "1980~90년대 유행했던 팝송 메들리는 있었지만 가요 메들리는 처음"이라며 "8090 음악에 맞춰 춤추는 클럽이 유행하고 이런 노래를 찾는 사람이 많아져 새 메뉴를 넣게 됐다"고 말했다.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20년 전 유행했던 문화가 왜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우선,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 물결과 함께 우리 사회에 등장한 다양한 대중문화의 원형(原型)이 그 시절에 탄생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원형들은 다양하게 갈라지고 진화했지만 언제든 다시 즐길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중반 등장한 댄스·힙합·록 장르 등은 현재 대중음악의 기본"이라며 "정치적 이유로 소비했던 이전과 달리, 개인의 개성과 감성에 따른 문화 소비가 처음으로 이뤄진 시기였다"고 말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시대를 가르는 격변이 많았고 이런 상황이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작품 활동을 북돋아줬다는 해석도 있다. 박지향 큐레이터는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던 세계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면서 개인의 감성과 본능을 중시하기 시작했다"며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중국 톈안먼 사건 등을 겪으면서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개성이 폭발적으로 증폭됐고, 이것이 다른 시대와 차별성 있는 작품의 등장으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1990년대 데뷔해 국민가수라고 불리던 god는 9년 만에 재결합해 대중 앞에 섰다.
    1990년대 데뷔해 국민가수라고 불리던 god는 9년 만에 재결합해 대중 앞에 섰다. /싸이더스HQ 제공
    1980~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풍족한 소비 시대의 주인공이 나타난 것도 한몫했다는 평가도 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빈곤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고통의 시대가 끝나고 소비문화와 즐거움의 코드가 처음으로 나타난 8090 시대에 청소년이나 대학생이었던 세대가 30~40대가 되면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열망이 8090 문화의 부활로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변주'

    다시 유행을 타고 있는 8090 문화의 특징은 '변주(變奏·variation)'와 융합이다.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나 복제가 아니라 시대에 맞게 변형되고 새로움을 추가한다. 이것이 10대와 40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탁구와 볼링이 단순 스포츠에서 벗어나 '펍'이라는 새로운 문화의 옷을 입은 것이 대표적이다.

    탁구는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렸던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현정화·리분희의 남북 단일팀이 단체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프로야구, 프로축구 등 프로스포츠의 성장과 함께 인기가 시들해져 관심에서 사라진 듯했다.

    최근 등장한 핑퐁(ping-pong·탁구)펍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국내 최초의 핑퐁펍 '서울핑퐁펍'. 저녁 시간만 되면 빈 탁구대를 기다리는 사람이 줄을 선다. 115㎡(약 34평) 규모 작은 술집에 놓인 2대의 탁구대에서는 맥주를 넣은 잔에 탁구공을 넣는 '비어퐁' 게임이 벌어진다. 좌석이 50여개인 이곳엔 평일 100여명, 주말 200여명이 찾는다. 한정현 사장은 "술을 먹거나 노래방에 가지 않고도 남녀노소가 어울려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고민하던 중 예전에 유행이었던 탁구를 생각해냈다.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층이 핑퐁펍을 찾는다"고 말했다.

    한때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은다'던 볼링장도 같은 성공 방식을 따르고 있다. 볼링도 치고 가벼운 술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2년 동안 수도권에만 볼링펍이 20여개 생겼다. 이 볼링펍에는 1980~90년대 볼링을 쳐봤던 30~50대는 물론, 20대들까지 몰리고 있다.

    패션 분야는 '변주'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는 분야로 꼽힌다. 삼성패션연구소는 '2014 패션 산업 10대 이슈'를 발표하면서 '90년대 문화 코드'를 꼽았다. 오수민 삼성패션연구소 연구원은 "옷은 평범하게 입되 가방, 셔츠 등 특정 아이템은 8090 스타일을 접목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 2014년 패션의 특징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