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관의 인문학 서재] 위기가 닥치면 군중은 남을 탓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조선일보
  •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입력 2014.12.27 03:00

    르네 지라르 '희생양'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14세기 중반 프랑스 북부 지방에 페스트가 돌았을 때 공포에 휩싸인 군중 사이에 "유대인들이 강과 샘에 독약을 풀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그 때문에 어느 마을엔 페스트가 번지기도 전에 광분한 군중에 의해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이 광기 어린 학살을 통해 군중은 이웃과 가족이 페스트로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페스트의 공포를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르네 지라르가 쓴 '희생양'(민음사)은 집단적 박해와 희생양이라는 관점에서 인류 문화를 해석하고 신화와 성서를 분석한 책이다.

    집단적 박해는 흔히 문화적 질서를 규정하는 차이와 규칙이 소멸하는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다. 페스트·홍수·지진 같은 대재앙에 직면하면 신분이 높다거나 가난하다거나 하는 차이는 소멸된다. 이러한 위기에 부닥치면 사람들은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타인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경향이 강하다. 집단적 박해의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들에게는 절대 권력이나 무구한 사람들을 향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범죄, 신성 모독과 같은 종교적 범죄 혹은 강간·근친상간 등 성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박해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민족적·종교적 소수파와 같은 집단에서 선택된다. 병, 광기, 선천적 기형, 후천적 장애 등 육체적 비정상 탓에 박해자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는 평균적 기준에서 상하 양쪽으로 멀어질수록 박해받을 위험은 더 커진다. 지나치게 가난하거나 추하고, 혐오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부유하거나 아름답고, 호감을 주는 것 역시 집단의 분노를 자극한다.

    르네 지라르 '희생양'
    구매하기 미리보기
    부자와 권력자는 평상시에 행사했던 그 영향력 때문에 그들에게 집중되는 폭력이 정당화된다. 프랑스대혁명 때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절대 권력을 행사한 아름다운 왕비인 데다 오스트리아 출신 외국인이라는 것 등 희생양으로 지목될 조건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그런 탓에 재판 과정에서는 아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상투적 비난에 해당하는 혐의가 추가되었다.

    지난 한 해는 국민적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유난히 많았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으로 지목해 국민적 공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 역시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희생양을 향한 비난과 폭력은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할 수는 없다. 국가적 재앙이나 파장이 큰 사건일수록 선동에 휘말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