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잠들어 있던 王國, 천년고도 신라가 부활한다

입력 2014.12.26 03:00

신라왕경 복원·정비사업
정부·경상북도·경주시 공동 추진
월성·황룡사·동궁 등 핵심 유적 8개
20년간 1조 투입해 복원·정비 진행

8세기 세계 4대 도시 서라벌
삼국유사 근거해 인구 90만명으로 추정
203개 사찰 등 도시 內 유적·유물 풍부
집집마다 숯 피우는 등 경제력도 갖춰

신라의 수도 서라벌의 인구가 90만명?

그 근거는 고려의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서라벌이 한창 번성했을 당시인 8~9세기때 그 규모는 '17만8936호'에 이른다고 기술했다. 1호의 가족수를 5명으로 했을때 89만4680명. 100만에 가까운 사람이 한곳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1000년 가까이 신라의 수도로 자리했던 서라벌, 현 경주의 8세기 경 인구 추정치다. 1000년도 훨씬 전에 말이다. 숫자를 구체적으로 적시했으니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경북도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가 번성했을 당시인 서기 7~8세기 경주의 모습을 컴퓨터그래픽으로 구성한 모습. 10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살았던 것을 보여 주듯 기와집이 시가지를 꽉 채우고 있고, 가운데에는 해자가 월성을 휘감고 있다. /경북도 제공
그래서 서라벌은 당시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현 시안), 사라센제국의 수도 바그다드,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과 함께 세계 4대 도시에 포함됐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 한양 인구가 20만이었고, 2013년말 경주시의 인구가 26만3283명인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다. 더구나 경주 도심의 인구가 15만여명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1000년도 넘은 당시 인구가 100만명에 가까웠다는 점은 더욱 그렇다. 그만큼 서라벌의 인구나 기능이 국제적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셈이다.

이처럼 서라벌의 규모는 곳곳에 남아 있거나 알려진 유물·유적에서 짐작할 수 있다.

높이가 80m가 넘는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고, 약 5m 높이에 황금과 철 3만5007근이 소요된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한 것은 서라벌의 스케일을 짐작케 한다. 또 서라벌에서는 집집마다 숯을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고, 도시계획도 잘 돼 있어 주소만 알면 집을 찾기가 수월했다고 한다. 숯을 피웠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력을 갖췄다는 뜻이고, 생활 역시 쾌적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경주시 시가지를 하늘에서 촬영한 모습. 번성했던 신라 시대와 비교하면 오히려 소박하다는 느낌이 든다./경주시 제공
경주시 시가지를 하늘에서 촬영한 모습. 번성했던 신라 시대와 비교하면 오히려 소박하다는 느낌이 든다./경주시 제공
이러한 신라 천년 고도 경주의 중심부에 있는 중요한 유적들이 복원되고 정비되는 역사적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정부와 경북도, 경주시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추진하는 '신라왕경(王京)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이다. '왕경'이란 수도를 일컫는 말. 지난 2006년부터 오는 2025년까지 20년간 1조에 가까운 945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다.

여기에는 월성 복원·정비를 비롯 황룡사 복원·정비, 동궁과 월지 복원·정비 등 모두 8개 사업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신라왕경의 골격을 복원하고 천년도고 경주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한편 역사문화 자원의 가치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 정비사업의 취지다.

경주를 세계적인 문화와 관광의 도시로 가꾸겠다는 의지는 벌써부터 있어왔다.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됐다. 토함산, 오릉, 남산 등 13개 사적지구로 크게 묶어 중점 정비하자는 이 사업은 1979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이후 2004년 '고도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 제정, 2005년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계획' 수립으로 전기를 맞기도 했다. 한편으로 문화재 보존을 둘러싸고 개발이냐, 보존이냐는 갈등이 일기도 했다.

신라 왕궁이 있던 월성을 발굴하는 모습. 신라 멸망 이후 폐허로 남아 있는 이곳에는 각종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신라 왕궁이 있던 월성을 발굴하는 모습. 신라 멸망 이후 폐허로 남아 있는 이곳에는 각종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이러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어쨌든 신라왕경사업은 이제 본궤도에 올랐다. 이에 따라 지난 12일 사적 제16호인 경주 월성에 대한 발굴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미 월정교가 거의 복원이 돼가고 있지만 신라왕경사업의 핵심 사업은 월성의 발굴작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의 비밀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인 1915년 성벽 하부, 1979년에서 80년 동문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잠깐 있어 왔지만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1000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이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 신라왕경은 어디를 말하며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라왕경은 동쪽으로 명활산과 소금강산, 서쪽으로 부산·단석산·망산 등으로 연결되는 주사산맥, 남쪽으로 남산에 각각 둘러싸여 있다. 또 서천과, 동쪽 지류인 북천, 남천 등의 하천이 서라벌을 휘감고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속에서 월성을 중심에 두고 각종 시설물이 배치됐다. 월성의 동쪽 담장에 잇대 남북으로 뻗는 너비 23m의 왕경대로(王京大路), 월성의 북단을 거쳐 동서로 연결되는 너비 15.5m의 대로를 축으로 왕경의 전체에 격자식의 도로가 건설됐다. 이 도로는 잔자갈을 층층이 깔고 맨 위층은 황갈색 점질토와 사질토로 다짐한 것이라고 한다.

궁궐의 경우 초기 금성(金城)이 있다고 했으나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있다. 제5대 파사왕때인 서기 101년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월성(月城)은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때인 935년까지 왕궁으로 사용됐다.

불교가 융성했던 탓에 왕경에는 수많은 사찰이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찰의 수는 203개. 대표적인 것이 왕실사찰로 월성 바로 옆에 자리한 황룡사와 분황사다.

그래서 신라왕경 지역에는 그 어느곳보다 풍성한 유적과 유물이 분포해 있다. 경주시 전체 지정문화재 306건중 51.3%인 157건이 집중분포해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과연 신라천년 고도 경주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는 이 사업이 끝나는 2025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유적들이 복원되면 경주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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