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이 다음 달쯤 싱가포르에서 민간 전문가와 정부 당국자들이 만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1.5트랙' 접촉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양측이 본격적인 대화 재개를 검토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의 외교소식통들은 3일(현지 시각) "북한 외무성 당국자와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가 만나는 방안을 양측이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그동안 자주 만나온 싱가포르에서 다음 달 접촉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미·북이 만날 경우, 북한 측에서는 6자회담 수석대표인 리용호 외무성 부상, 차석대표인 최선희 외무성 부국장이 참석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측에서는 오바마 1기 행정부 때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맡았던 스티븐 보즈워스 전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2005년 9·19 공동성명 채택 당시 6자회담 차석대표를 맡았던 조지프 디트라니 국가정보국(DNI) 산하 비확산센터 소장, 리언 시걸 미국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 등이 참석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바마 행정부는 2012년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중단과 핵·미사일 실험 유예 등을 골자로 하는 '2·29합의'를 2주 만에 깨버린 이후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 "미 정부가 북핵 문제에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정치적 부담이 적은 1.5트랙 접촉으로 탐색전에 나섰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최근 성 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새로 부임하면서 이런 기류가 더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 현장을 지켜봤던 성 김 대표는 대화를 통한 대북관계 개선에 의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소식통은 "글린 데이비스 전 대표는 2·29합의 파기 이후 극도로 몸을 사렸지만, 성 김 대표는 과거 대화를 통해 북한으로부터 핵개발 관련 자료 수천 쪽을 받아낸 적이 있어 상대적으로 자신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 속에 북한과의 대화 전제조건이 상당히 낮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국 측의 한 관계자는 "북한이 비핵화를 해야 대화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비핵화 과정에 들어서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면 대화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우리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황준국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도 이날 러시아에서 "6자회담이 재개되려면 어느 정도의 조건이 갖춰져야 하지만, 북한이 1에서 10까지의 구체적 조치들을 다 취해야 하고 그다음에야 우리가 대화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며 '대화 전제조건 완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임기 말 외교적 업적이 필요한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도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슬람국가(IS) 퇴치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북한과는 대화를 재개하는 것만으로도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란 핵협상이 기대보다 지지부진한 것도 북한 쪽에 다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북한도 외교적 고립과 인권 압박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대화를 통해 활로를 뚫으려 할 유인이 높다.
다만 북한 인권문제가 미국 등의 주도로 유엔총회에서 통과될 경우 양측 간 대화가 막힐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핵 협상에 진정성을 갖고 임할지도 미지수다. 정부 관계자는 "1.5트랙 차원의 미·북 접촉은 그동안 1년에 몇 차례씩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