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김무성 대표의 솔직 털털 화끈, 대장의 화법

    입력 : 2014.11.28 18:50 | 수정 : 2014.11.29 13:31

    과연 ‘대장’답다. 김무성 대표의 화법은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 법이 없다.

    지난 11월 18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만났다. 약속시간은 오후 4시. 그러나 김무성 대표가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것은 4시 40분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그는 인터뷰 직전 공무원노조총연맹과 만나 연금 개혁을 위한 ‘당·정·노 실무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며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취임한 이후 김 대표가 언론과 가진 첫 인터뷰다.

    7월에 당 대표로 취임하셨어요. 4개월 남짓 지났는데 일해보니 어떠신가요? ‘안 되면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마음먹은 대로 될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거든요. 문제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에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생각을 해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말이죠. 정치는 사람이 중요해요. 그중에서도 특히 국회의원이 중요하죠. 국회의원들이 세미나 할 때 참석해서 격려도 하고, 축사도 하고 싶은데 시간이 잘 안 나요.(웃음)

    당대표니 더욱 바쁘시겠어요. 일주일에 세 번은 조찬 세미나 하고, 세 번은 아침 9시에 회의를 해요. 다른 일정도 빡빡하고요. 당 대표가 되기 전에 ‘대표가 되면 해야겠다’고 구상했던 것들이 진전이 잘 안 되고 있어서 마음이 조급해요.

    진전이 안 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정당 민주화요. 당원이 주인이 되는 민주정당을 만들겠다고 했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당원들에게 모바일로 의견도 물어보고. 그런데 그 애플리케이션 만드는 데 3개월이 걸린대요. 그게 빨리 나와야 하는데.

    국민이 바라는 것 중 하나가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인데요. 이 부분은 잘돼가고 있다고 보시나요? 국회의원 특권을 내려놓기 위해 혁신위원회를 만들었고, 혁신위에서 1차로 9개 안을 만들었어요. 마치 전체 의원이 이걸 거부하는 것처럼 비춰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고요, 찬성하는 사람이 다수예요. 민주주의는 과정이거든요. 안건을 하나 만들었다고 해서 모두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따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언론이 마치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니….(웃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동료 국회의원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정말로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억울한 점도 많죠. 무임금 무노동인데 국회의원들이 실제로 노동을 하기는 하느냐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고…. 그런데 국회가 열리지 않을 때도 국회의원들은 일이 많아요. 국회 파행은 고쳐야 할 일이지만, 파행된다고 국회가 노느냐. 천만의 말씀이거든요. 의원회관에 하루만 있어보면 알아요, 의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의원들은 쉴 시간이 없어요. 밤 12시까지 전화 빗발치는 건 기본이고, 주말에 모두 놀 때 국회의원들은 전부 지역구 내려가서 일하거든요. 지역구 사람들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24시간 365일 일하죠. 1월 1일엔 노는 줄 압니까 국립묘지 가야죠.(웃음) 크리스마스 같은 날엔 좋은 일 하러 간다고 평소보다 더 바빠요.

    정치판을 보는 국민의 시선 중 또 하나가 ‘사회 대립’에 관한 것입니다. 여야도 그렇고, 사회 곳곳이 분열돼 있어요. 우리 사회는 병리적 사회예요. 진영 논리에 빠져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죠. 정치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그래요. 의견이 양극단으로 치달아가니 아무것도 안 되죠. 중간 지점이 허용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해요. 그런데 이 얘길 깊이 하면 또 언론에 말려들어 갈 것 같으니 이쯤 합시다, 허허.

    # 정치 다시 하라면 안 해… 대권 논의 일러

    김무성 대표는 어릴 적부터 정치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민의원, 참의원에 출마한 아버지 덕분에 그에게 선거판은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절대 정치만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김 대표는 결국 이 길로 들었다. 가슴 속에 잠재돼 있던 야성이 끝내 고개를 든 셈이다.

    정치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어릴 적 아버지가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에서 민의원에 출마했어요. 저는 라디오로 선거 중계방송을 들었는데, 이겼다는 소리를 듣고 잠이 들었죠.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20여표 차이로 졌다는 거예요. 집안 어른들, 형들이 비분강개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이후 4.19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경상남도 참의원에 출마하셨죠. 저는 어릴 때부터 선거 일을 도왔어요. 인쇄소에서 선거홍보물이 오면 친구들이랑 그걸 접고, 트럭 타고 홍보물 나눠주고, 선거 유세도 듣고. 그러다 5.16이 일어났고, 아버지가 붙잡혀 가서 오랫동안 고생하셨죠. 죄가 없으니 풀려는 났지만, 형제들에게는 ‘절대 정치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우리 집안 사람들은 정치에 안 맞는다고.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예’ 했는데, 그때부터 사회정의라든가 민주화라든가 그런 것에 관심이 생긴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삼선 개헌 반대 데모도 주도했고, 고향에서 13개 고등학교 연합 시위를 주도했다가 잡혀서 고생하기도 했어요. 그런 시절을 보내고 나서 ‘이제 절대 학생운동 안 할 거고 정치도 안 한다’고 다짐했고, 사업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광주민주화운동 때 잠자고 있던 야성이 불타올라 버린 거예요. ‘아무리 과격한 데모를 한다 해도 어떻게 군인들이 우리 백성을 총 쏴 죽일 수 있느냐’ 한 거죠. 그래서 YS 따라다니며 민주화 투쟁 한다고 나서기 시작했어요. 민주화 투쟁 끝에 정치판에 들어오게 됐고.
    어릴 때부터 마음속 깊이 야성이 쌓였던 거네요. 친구들 사이에 복잡한 일 있을 때 그거 정리해주면 리더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애들끼리 싸우면 말리고 그랬어요. 또 주먹도 좀 셌거든. 그러다 보니 대장 역할을 많이 했죠, 별명도 대장이었고. 예전엔 이 별명이 좋았는데, 요새는 여성들이 마초를 싫어하니까.(웃음) 아무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치 성향 같은 걸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정치 오래 하시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민주화 투쟁 할 때 제 이름으로 당사를 사야 했어요. 그때 전두환 정권 말기에 쿠데타설이 돌았어요. 우리 집이 지금은 별것 아닌 사업가 집안이지만, 그 당시엔 재벌 소리를 들었단 말이죠. 그래서 당사를 제 이름으로 샀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놓고 잔금 치를 때까지 그사이에 쿠데타설이 엄청 돌았어요, 다 잡혀간다는 소문도 돌고. 계엄령 터지면 도망가야 하느냐 순순히 잡혀가야 하느냐 이런 걸로 선배들이랑 토론도 했어요. 술집에 앉아 술 마시면서 나는 도망갈 거다, 나는 잡혀갈 거다 이랬다니까요.(웃음) 갖고 있던 메모도 다 찢어 없앴어요, 가지고 있으면 고초 당하니까. 잔금 주는 날 아침에 YS한테 가서 “총재님, 계엄령이 터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면 이 돈 줘도 떼일 텐데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YS가 “우리가 언제 돈 보고 정치했노. 그냥 갖다 줘라” 하시더라고요. 성격이 원래 그런 분이니까.(웃음) 그런데 계엄령이 안 터지고 6.29 선언이 나왔죠. 그때 굉장히 고심했던 기억이 나요.

    두 번째 위기가 있었다면요? 두 번째는 충성을 다 바쳤던 당으로부터 공천을 못 받은 거죠. 제가 이명박 권력 아래에서 사무총장을 했는데 공천을 못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우파가 권력을 잡았으니까 마음이 편했어요. ‘좋다, 탈당하자’ 했죠. 그런데 이명박 권력은 박근혜 쪽 대장이라고 공천을 안 줬는데, 이번에는 박근혜 권력에서….(웃음) 그런데 정치는 그게 아니거든요. 정치는 협상과 타협이에요. 다른 당도 아니고 같은 당이잖아요. 저보고 (이명박 정부에서) ‘네가 정무장관 맡아야 일이 풀리겠다’ 하는데, 안 된다고 해서 제가 안 했어요. 그러다 일이 안 풀리니까 이번엔 원내대표 해달라고 해서 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 해서 안 했어요. 세 번째는 했죠. 제가 원내대표 했을 때 제일 정치가 잘됐어요. 그런데 공천을 못 받았어요. 무조건 탈당이지, 내 성질에.(웃음) 그런데 그때는 대선이 불과 몇 달 앞이었단 말이죠. 7~8개월 뒤에 국가 운명이 결정되는데, 제가 탈당하면 100% 우파 세력이 지는 거죠. 그래서 백의종군했죠. 박근혜 대통령과 저는 인연인 것 같아요. 같은 학번이고, 같은 임기에 국회의원이 됐고. 과거엔 미워하던 사이가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했고, 결재도 안 올릴 정도로 신임을 받기도 했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내 인생보다 박 대통령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았다고. 지금도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에 남는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여성 독자들이 특히 관심 있어 할 주제로 넘어가볼게요. 저출산 문제 전문가이시죠? 저출산 문제에 3년 전부터 관심을 가졌어요. 지금 출산율이 1.08까지 떨어졌는데, 합계출산율 2.1이 돼야 인구가 유지돼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정부에서 60조원을 퍼부었는데도 이 수준이죠. 그런데 이게 계속 떨어지는 추세였다가 딱 한번 올라간 적이 있는데, 황금돼지해였죠.(웃음) 저출산 고령화는 정말 심각합니다. 출산율이 2000년대 초부터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태어난 아이들이 20년 뒤에는 사회에 나와 세금을 생산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2020년이 되어서 세금 낼 인구가 줄어든다 그러면 이미 늦은 거죠. 그럼 노동력을 수입할 수밖에 없어요.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죠. 이건 재앙이에요, 재앙.

    저희 집도 아이를 둘 키우는데, 집사람이 후배들에게 아이 낳아 기르라고 말하기가 참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현실이에요. 저도 딸보고 ‘너는 무조건 아이 셋 낳아라’ 했는데 현실을 모르는 소리였죠. 우리 딸이 첫째 요만할 때 바로 둘째를 가졌는데, 어느 날 첫째가 아파서 응급실에 입원을 했어요. 그러니 애가 엄마랑 떨어지려고 하나. 배부른 우리 딸이 링거 맞는 손자를 안고 네 시간 동안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는 거예요. 아, 아이를 두 명 이상 낳는다는 게 힘든 거구나. 베이비시터 구하려고 하면 기본이 250만원이에요. 그러니 서민들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느냐는 말이죠. 무상급식보다 시급한 게 무상보육이에요. 돈 준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파트타임 잡을 유연하게 구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어야 하고. 지금 파트타임 잡 임금은 일반 임금보다 싸거든요?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는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보다 낮지 않아요.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러면 국제경쟁력은 떨어져요. 지금 가장 큰 고민은 비정규직 문제예요. 최근에 영화 <카트>가 개봉해서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도 보고 그러는데, 그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자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세계는 국제경쟁력 아닙니까.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려면 비정규직이 많아야 해요. 같은 일 하고도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적게 받는 풍토를 바꿔야 해요. 비정규직은 퇴직금 같은 건 없잖아요?. 그러면 적어도 시급은 비슷해야죠.

    요즘 강력한 대권 주자로 입지를 다지고 계신데, 대권 도전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됩니까. 국민들이 만들어줘야 하고, 천지조화가 맞아떨어져야 하는 거죠. 지금으로서는 그런 논의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여전히 너무 부족한 사람이고. 제가 대권을 생각했으면 공무원 연금법 총대 메겠어요? 공무원 표 다 달아나는데. 저는 그런 생각 안 해요, 옳다 싶으면 손해 보더라도 밀고 나가죠.
    소신대로 밀고 나가다 보면 오히려 대권에 가까이 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 우리나라 유일한 합법공무원노조인 공노총 사람들을 만나고 왔어요. 처음엔 싸울 듯이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라를 생각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좀 받아들여달라고 호소했죠. 결국 좋은 합의를 봤어요. 제가 낸 안보다 더 좋은 안이 있으면 얼마든지 반영하겠다고 이야기도 했고요. 정당이라는 것은 선거를 위해 존재하는 건데, 선거 생각하면 이거 하겠나? 못 한다 이거예요. 공무원 100만 명이면 4인 가족 기준으로 400만 명 아닙니까. 400만 명 표를 잃는 건데 왜 하겠습니까. 이거 한다고 해도 박근혜 정부에서 얻는 이득은 적어요. 우리의 진정성, 순수한 애국심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정치하신 걸 후회하진 않나요? 다시 하라고 하면 저는 안 할 것 같아요. 아버지 말씀이 맞았어요. 성격이 정치와는 안 맞는 것 같아요.
    나중에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치사하지 않은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치사하다는 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 말해요. 우리 국민들이 보는 정치인의 모습이 그렇거든요. 사심 가득한 인간들이라는 거죠. 저는 별로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무슨 일을 할 때 내 것 챙기려고 잘 안 하거든요. 제가 정치 인생에서 주요 직책을 다 맡아봤는데, 예산 관련 직위에 있으면서 지역구 예산 챙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원내대표 할 때도 우리 지역 예산 안 가져갔어요. 그 당시에 다른 의원들한테 “나부터 우리 지역 예산 안 챙길 테니, 너희들도 쓸데없이 챙겨갈 생각 마라” 하고 엄포를 놓았는데, 나중에 보니 엄청나게 끌어갔더라고요. 제가 지역 예산을 많이 가져갔으면, 원내대표로서 그렇게 당당하게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 내 성정은 정치인보다 예술가

    김무성 대표의 집안은 ‘예술가 집안’이다. 김 대표의 부인은 피아니스트 최양옥 씨로,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두 딸은 모두 디자인을 전공했다. 아들은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배우 고윤(본명 김종일) 씨다. 김 대표는 “나 역시 예술을 했어야 한다”며 껄껄 웃었다.

    아드님이 배우예요. 대표님이 정치하지 말라고 했더니 배우 하겠다고 했다면서요. 다짜고짜 와서 정치하겠다기에 ‘너 이놈아, 미쳤냐’고 그랬죠. 제가 해보니까 정치는 가정의 희생이 너무 크거든요. ‘아버지가 정치판 들어와서 후회하는 걸 보고도 그러느냐. 너희랑 주말에 놀아주지도 못했다. 대화 없이 키운 걸 그렇지 않아도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안 된다. 하지 마라’ 그랬죠. 그런데 전역하고 오더니 이번엔 연기자가 되겠다고, 허허. ‘진짜 미쳤구나’ 그랬죠. 달래도 말을 안 듣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 하라더니 다 거짓말이었냐고. 그래서 ‘좋다, 대신 내가 도와줄 수는 없다. 연기자 하려면 학교 들어가서 배워라’ 했어요. 지금 단역으로 좀 나오고 있어요, 자기가 아르바이트 해 돈 벌면서. 관심이 안 갈 수가 있나요. 연기 지도도 내가 하고.(웃음)

    소질 있는 것 같나요? 열심히는 해요. 방문 잠그고 대사 외우고 소리치고. 그런데 자식은 항상 부족해 보이는 법이니까요. 요새는 MBC 드라마 <미스터 백>에 나오는데 가족들이 모여서 본단 말이에요? 아들이 곧 자기 나올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안 나와요, 잘린 거죠. 굉장히 실망하더라고요. 그래서 위로해줬어요. 흐름을 보니 아직 네가 나올 때가 아닌 것 같다고.(웃음)

    사모님이 반대하진 않으셨나요? 마누라가 많이 울었죠. 혼자 밤새 울더라고요. 원하는 대로 되질 않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다 챙겨 보고 해요. 우리 집사람은 자꾸 어디에 이야기 좀 해주라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많이 싸워요. 제가 한 다리 걸치면 연결은 되죠. 그런데 얘가 아직 어설프거든. 그러면 한두 작품 주연 맡았다가 그다음부터 못 나와요. 완전히 바닥부터 시작해야 해요, 아직 나이도 어리니까.

    정치한 걸 후회하실 만큼 가족들한테 못 해준 게 많으신가 봐요. 당장 우리 둘째 딸 말이에요. 아빠 때문에 고생 많이 했죠. 우리 딸이 리즈디(RISD)라고 세계적인 디자인 스쿨을 나왔어요. 거기서도 천재 소리 듣던 애라고. 그런데 (특혜 채용이라고)기자들이 학교(김 대표의 둘째 딸은 수원대 교수로 재직중이다.)로 몰려와서 학생들 붙잡고 너희 교수님 제대로 가르치느냐, 영어는 제대로 하느냐 묻고 그랬대요. 미국 학교에까지 연락해서 졸업장 있느냐고 묻고. 1년 다니고 그만둔 동명이인이 있어서 오해를 받았나 봐요. 그러니 우리 애가 기가 막히죠. 얼마간 잠도 못 자고, 그만둔다고 하는 걸 겨우 말렸어요.

    사모님이 정치 그만두라는 말씀은 안 하셨겠지만 원망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집사람은 처음에 이혼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별거했죠. 장인어른이 5선 국회의원이에요, 남해에서 5선 하신. 어릴 때 아버지를 가까이 못 하고 멀리서만 본 거죠. 저한테도 정치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민주화 투쟁 한다니까 와이프가 못 살겠다고 했어요. 한 2년 유학 갔다 왔죠.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은 적응하셨을 거고요. 어느 정도는요. 그래도 안 좋은 기사 나오면 집에 가서 볶일 생각 먼저 해요.(웃음)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니까 당신은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말이야. 집사람은 굉장히 조용한 사람이에요. 나서기도 싫어하고. 그래도 이제 이력이 붙어 그런지 대표 부인 역할을 자꾸 하려고 아이디어도 내고 하더라고요.

    겉으로는 ‘대장’처럼 보이지만 실제 성격은 섬세하고 내성적이라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섬세하고 치밀하고 그래요. 숨기는 거 못하고, 거짓말도 못해요. 그러니까 이게(정치가) 안 되는 거지.(웃음) 저는 사업할 때 사기도 많이 당했어요.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와서 그럴듯하게 얘기하면 속아서 돈 주고 그랬어요. 돌이켜 보면 제 성정에는 예술가가 맞았을 것 같아요.

    처음 겪은 ‘실패’가 1년 재수한 일이죠. 그걸 바탕으로 젊은 친구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요. 고등학교 들어갔다가 한 해 휴학해서 재수가 된 거죠. 학교 다닐 때는 공부가 최고예요. 그런데 저는 공부를 안 했어요, 급변하는 세상에 관심을 두다 보니. 고등학교 때 신문을 열심히 봤거든요. 그로부터 굉장한 지식을 얻었죠. 아버지가 경제 신문을 보라고 하셔서, 그 당시 <서울경제>를 챙겨봤어요. 젊은 친구들은 제 시간에 제 역할에 충실한 게 제일이에요. 나도 공부를 좀 잘했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몰라. 내가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웃음)

    쉴 때는 주로 뭘 하시나요? 영화 보고 싶은데 통 못 봤어요. 술 마시고 들어가면 안 자는 습관이 있어요. 너무 많이 마셔서, 자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웃음) 취한 상태로 글을 볼 수는 없으니까 주로 드라마를 보죠. 최근에는 <마마>를 한 회도 안 빼고 다 봤어요. <마마> 보기 전에 <왔다! 장보리>도 보고.

    대표님의 인생철학이 궁금해요.
    아이들한테 매사에 당당하게, 그리고 열심히 하라고 가르쳤어요. 정치판에 와서는 선공후사, 아주 흔한 말이지만 그걸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더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김무성 대표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이야기를 꺼냈다. “친인척 관계가 아닌데 잘못 알려져 있어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준 것 같다”는 것. “언젠가 한번은 이걸 밝혀야겠다 생각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친인척관계로 알려져있지만 전혀 아니거든요. 어느 언론에서 한 번 잘못 보도한 이후 사촌 간이 돼버렸네요, 허허.”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12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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