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로스앤젤레스 박은주 선임기자] 98세 畵家가 말했다… "난 이중섭 들러리가 아니야"

  • 선임기자 박은주

    입력 : 2014.11.14 15:47

    우리나라 1세대 畵家·미술평론가 … '근현대 화단의 산증인' 김병기

    '비운의 화가' 이중섭과의 인연
    초등교 6년·日유학도 함께… 그의 시신 수습해 안장까지
    "김환기·박수근 작품도 좋지만 이중섭이 가장 훌륭하다고 봐… 6·25 리얼리티를 대변하니까

    "어지러운 현대史, 온몸으로…
    "해방 후 김일성이 北 들어와 자기 그림 그려달라 하던데… 난 北과는 안 맞아 월남했지"

    한국서 49년, 미국서 49년
    "美선 도면 그려서 먹고살았지… 그림속 강한 선이 여기서 왔어"
    "인생에 '절대'란 없다… 그 말에 절대 속지 말아라"

    김병기(金秉騏)는 우리나라 1세대 미술평론가이자 화가이다. 그러나 미술로 밥 벌어먹지 않은 한 그를 아는 이 별로 없다. 이럴 때 흔한 수법이 그의 '족보' 나열.

    부친 김찬영은 고희동·김관호에 이은 우리나라 세 번째 일본 미술 유학생이었다. 그의 약혼 주례는 고당 조만식 선생, 결혼 주례는 주기철 목사가 봤다. 주기철 목사는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로 잘 알려진 항일운동가. 장인은 소설가 김동인의 형이며 항일운동가인 김동원 제헌국회 부의장.

    이런 얘기는 어떤가. '비운의 화가' 이중섭과 초등학교 6년을 같은 반에서 다녔고, 같이 일본 유학을 했고, 1956년 무연고 처리된 이중섭 시신을 수습해 화장하고, 유골을 갈아 망우리 묘지에 묻었다.

    해방 직후 남북한에서 모두 '화단(畵壇) 정치'를 했다. 그랬던 그는 1965년 돌연 미국에 정착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 간혹 '김병기는 한국 추상의 선구자'라는 전문가 평가만이 맴돌 뿐이었다.

    그리피스 천문대가 보이는 로스앤젤레스 로스펠리즈의 아파트에 사는 그를 몇번 만났다. 처음엔 '이중섭 비화'가 궁금했지만, 만날수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래 사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누구'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김병기 화백
    인터뷰를 한 지 일주일 만에 김병기 자택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8년째 그리고 있다는 그림을 다시 손보고 있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아흔여덟 살 화가는 그렇게 순간을 살고 있었다. 다음 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린다. / 로스앤젤레스=박은주 선임기자

    ◇북한에서 해방을 맞다

    ―미국서 49년을 사셨네요.

    "내가 98세인데, 49세에 한국을 떠나 나머지 인생을 미국서 살았어요. 발란스가 좋지. 나는 동양에서는 서양만 생각했던 사람인데, 날이 갈수록 동양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

    ―부인이 안 계시니 외로워서 그러신 거겠죠?

    "전혀. 집사람이 그립기도 하지만, 외려 자유로운 부분이 있다구. 젊어서는 서양을 생각하며 외연을 넓혔고, 그러다가 나는 '그림은 뭔가' 하는 질문에 다다른 거지."

    ―선생님은 누굽니까. 이중섭은 알아도 추상화가 김병기는 모릅니다.

    "나는 한국에서 평론가, 대(代)를 이은 화가, 사회 참여 화가로서 유명했어. 북한에서는 북한미술동맹, 월남 후 전쟁 때는 종군화가단 부단장도 했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도 하고. 모두 본질적인 화가는 아니지. 어떤 경우든 그림을 지키는 사람이 있지만, 난 고고한 예술가 타입은 아니야. 그때는 또 거의 전부가 나라 만드는 일에 휩쓸리기도 했고."

    ―북한에서 적잖은 갈등을 겪으셨다면서요.

    "해방되고 김일성이, 그러니까 김성주가 북한에 들어왔을 때 나이가 젊고 상고머리를 한 거야. 사람들이 '저건 가짜다'고들 했지. 한 번 만났어. 자기 그림을 많이 그려서 좀 알려 달라는 거야. 그 무렵엔 김일성을 크게 치지 않았어. 조만식 선생이 지도자가 될 줄 알았지. 게다가 스탈린 초상이나 그려야지, 정물화나 어두운 그림은 못 그려. 나는 탐미주의적 성향이라 북한하고는 맞질 않았어."

    ―특히 뭐가 맞지 않았나요?

    "당시 자본주의 결함은 수백년간 겪어온 결함, 다 아는 결함이야. 그건 시정하면 되지. 사회주의적 결함은 우리가 겪어보지 않은, 알지 못하는 결함이었어. 나는 행동주의적 휴머니스트야. 당연히 모르는 결함과 먼저 싸워야지."

    ―해방된 날을 기억하십니까.

    "그날 우리 장인어른이 편지를 한 장 써줘요. 남북이 합쳐 건국에 나서자는 얘기인데, 서울 가서 고하 송진우 선생에게 전달하라더라고. 도망가는 일본인 틈에 끼어 기차를 타고 16일 서울역에 도착했지. 시뻘건 담벼락에 '우리 앞날에 희망이 있으니 동요치 말고 난동치 말라' 써 있어. 다음날 종로 화신백화점 근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봤어. 이쾌대를 만났지. 이쾌대는 정치적이라 상당히 들떠 있었어."

    ―그러다 많은 화가가 북으로 가고, 결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6·25를 큰 전환점이라 보지만, 그리 비극적으로 생각지 않아. 남한은 이러다 죽는다 싶어 열심히 살았고, 북한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공산주의 한 번 해보는 거지. 어쩌면 피할 수 없었던 일인지도 모른다고."

    이중섭미술관에 소장된 김병기의 '창변의 꽃'
    이중섭미술관에 소장된 김병기의 '창변의 꽃' / 이중섭미술관 제공

    ◇이중섭과 김환기, 그리고 김병기

    ―일본에서 도쿄문화학원(대학)에 다니며 아방가르드 미술에 심취했습니다.

    "일본에서 문화학원 들어가려고 입시 공부하는데 좀 시들하더라고. 내가 그때 좀 건방졌어. 간다(神田)거리에 갔더니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가 있어. 보는 순간 짜르르 전기가 와. 원생들 사이에 김환기도 있더라구. "

    ―이중섭의 친구이자 박수근과도 교류가 있었고, 김환기와는 일본·미국에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어느 작가 작품이 제일 훌륭합니까.

    "6·25의 리얼리티를 대변하는 작가는 누구냐, 이중섭이야. 전쟁을 직접 그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작품에서 '한국의 신화(神話)'를 본다고. 피카소 그림은 파격적이지만, 해부학적으로 틀린 구석이 없어. '소' 그림의 머리 방향은 그런 기준에서는 틀린 점이 있지.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박수근의 풍경은 좀 회고(懷古) 취미지만 우리의 향수(鄕愁)가, 그의 선량한 눈과 마음이 그림에 담겨 있어. 나는 (박수근보다는) 이중섭이가 더 높다고 봐. 박수근도 상당히 좋아. 둘 다 나는 높이 평가해. 물론 김환기도 훌륭하고."

    ―일본 유학 시절 시인 이상이 방문했었지요?

    "내 하숙집 친구를 찾아왔는데, 내 방이 제일 커서 같이 잤어. 이상은 그때 서른도 안 됐는데 쉰 살 노인처럼 보였어. 자고 일어나 내 그림을 한참 보더니 '동그맹이가 있구만' 하더라고. 얼마 후 이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때 그 동그맹이를 떠올리며 몇년 전 동그라미가 다섯 개 들어간 '나의 연대기'란 작품을 그렸어."

    ―유학 시절 청년 이중섭은 어땠나요?

    "일본 아이들이 토요일 날 파티를 하며 노래를 청하면 이중섭은 일어나 노래를 불러. '만경창파 흐르는 물에…' 이런 민족적인 노래를. 나는 노래를 부르지도, 그런 곡을 택할 사람도 아니야. 이중섭은 일본 아이와 결혼하며 병풍치고 족두리 쓰고,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붙였지. 난 그럴 용기가 없어. 나는 주저하는 사람, 이중섭은 용감한 사람이지. 나랑 이중섭은 말이 잘 통하진 않았어."

    ―선생님은 어떤 작가입니까.

    "비형상에서 형상을 찾은 사람. 고전과 전위, 동양과 서양의 교차점에 내가, 내 그림이 있지."

    ◇'절대'라는 말에 절대로 속지 말라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 자격으로 브라질로 떠났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탔는데 그때가 장마철이었어. 구름 위에 하늘이,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더라구. 랭보의 장편시 '술 취한 배'가 생각나데. '오 용골(龍骨·배의 척추 부분)이여 때려 부서져라, 나는 바다로 간다'. 미국에 남아 록펠러재단 기금으로 1년간 30개 미술관을 순회했지. 그리고 돌아가지 않은 거야."

    ―불법 체류네요.

    "1년이 끝날 무렵 이민국에 가서 '무슨 방법이 없느냐' 하고 물었어. 그랬더니 '앱솔루틀리 낫(Absolutely not)'이래. 정확히 하려고 사전을 찾아봤어. '절대로 안 된다'는 얘기야. 그런데 미국은 '앱솔루틀리'가 없어요. 또 인생에도 '앱솔루틀리'가 없어. 알아 두시라고. 앞으로 '앱솔루틀리'가 나올 때 절대 속지 말라고."

    ―그래서 무슨 길을 찾았나요?

    "워싱턴 국회의원이 1년씩 한 사람을 잡아둘 수(체류 비자 제공) 있는 길이 있더라고. 아내가 미국 사는 자기 동생 초청으로 이민올 때까지 6년간 그렇게 지냈어."

    ―영어도 별로 잘하지 못했는데 왜 미국에?

    "미국에 온다는 것은 우리 삶의 조건을 한번 떠나는 거예요. 미국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제 작가가 됐다' 싶어. 그게 내 마지막 기회였어."

    ―미국에서는 뭘로 먹고 사셨나요?

    "제도(製圖), 드래프트 맨(Draft man). 나는 입체도를 그릴 줄 아는 사람이니까. 제설 장비 기계 도면, 건축 도면, 병원용 해부도를 10년간 그렸어. 미국 와서 자를 대고 그림을 처음 그렸는데, 내 그림 속 강한 선이 거기서 왔지."

    ―미국 동부 사라토가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76년 사라토가 갤러리에서 개인전 할 때 동네 신문에도 났어. 제목이 '한국 작가는 처음엔 투사였다(Korean Artist was a Fighter First)'였어. 내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얘기를 해줬거든. 히피들과 어울리며 영어를 배웠지. 어느 날 동구 출신 교수가 '한국인은 어리석다. 왜 공산주의를 하지 않느냐'고 말해. 그건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이야. 내가 주먹으로 면상을 쳤지. 다음날부터 그 술집에서 공짜로 맥주 한 병씩을 줬어."

    ―미국 생활은 오로지 그림뿐이었나요?

    "외로웠지. 우리 아버지가 이쁜 여자를 좋아해 색시 얻어 서울 가서 사셨어. 우리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 그 슬픔을 이겨냈어. 내가 거기 안고 갔던 애기야. 근본적으로 내 안에 기독교가 있어. 순전하게 신앙적, 영적 경험을 했던 시간이었어. 그때가."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다

    ―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셨나요?

    "86년부터 가나화랑하고 인연이 생겨 2000년대 초에 화랑서 대규모 전시도 하고 잘 지냈는데 다리 병이 들었어. 한국에서는 못 고친대. 2006년에 LA사는 아들이 여기로 불렀지. 한마디로 죽으려고 왔지. 그런데 다리가 다 나았어."

    ―한국 화단에는 선생님께 여자 친구가 아주 많다고 소문났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사실 내가 휴머니스트야, 특히 여자를 좋아해."

    ―바람피웠다는 얘깁니까.

    "몰라. 나는 몇 사람 사랑했던 기억만이 있어. 다른 건 다 잊어버렸어."

    ―기억에 남는 여성이 있으신가요?

    "그걸 어떻게 말해. 나는 아버지처럼 성적으로 사랑하면서 어머니처럼 거기에 어게인스트(반대)하는 게 있어. 그런데 나는 이제 중세적인 사랑을 한다고. 능력이 없으니까."

    ―늙은 여자를 싫어하신다죠?

    "틀에 박혀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그런데 요새는 옆에서 잔등도 좀 긁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한국으로 돌아가시면 되잖아요.

    "한국에 가면 집 한 채는 있어야지. 그냥 아파트는 싫고 바닷가에 초가삼간 하나 있으면 좋겠어. 나는 할 수 없이 미국 시민권자가 됐는데 그게 제일 아쉽지. 국적 여부를 따지지 않고 초대전을 열어주는 것, 대단히 감사해.(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2월 2일부터 석 달간 그의 초대전이 열린다. 그의 최초의 미술관 전시다) 하지만 내가 진짜 바라는 건 이중 국적을 허락해줬으면 하는 거야."

    ―국적 갖고 뭐하시게요?

    "정신적인 용도 이외에는 없어. 나는 미국 시민으로 죽고 싶지는 않아. 가능하면 평양하고 합친 한국 사람으로 죽고 싶어요."

    ―선생님 인생은 들을수록 대단하지만 아직도 그냥 '이중섭 친구'라 불립니다.

    "고은이 쓴 이중섭 전기(傳記)에 내가 친구로 나와. 이중섭미술관에도 내 그림이 들어가 있어. 나는 늘 이중섭의 들러리이자 소도구야. 그게 편치는 않아. 나는 이중섭의 배로 산 사람이야. 이중섭이 어떻단 얘기가 아니야. 이중섭 같은 단거리 선수도, 나 같은 장거리 선수도 있는 거야. 난 김환기 친구로도 되어 있어. 그것도 기분 좋은 얘긴 아니야. 이런 영화를 찍고 싶어. 어떤 사람이 조연으로 나오는데, 나중에 보니 조연이 주인공이 되어 있는 영화. 나는 그런 주인공이 되고 싶어."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잊었던 근현대 인물 사전을 다시 들추는 기분이었다. 귀가 어두운 그는 일명 '포토그래픽 메모리(사진 같은 기억력)'를 갖고 있다. 책을 외웠대도 그렇게 말하는 건 쉽지 않다. 그는 근대의 화석(化石), 말하는 화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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