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결혼하는 임승혁(가명·30)씨는 요즘 '하루만이라도 종일 잠만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두세 달째 주중엔 2~3일씩 야근 하고, 주말에는 드레스숍·귀금속가게·가구점을 돌아다닌다. 지난달엔 7시간 걸려 스튜디오 촬영도 했다. '겨우 끝났다' 싶었는데, 여자친구가 "또 찍어야 된다"고 했다. 임씨가 "저번에 찍은 건 뭐냐?"고 묻자, 여자친구가 "그건 실내 촬영이고, 이번엔 '데이트 스냅'"이라고 했다. '데이트 스냅'은 야외에서 신랑·신부가 평상복 입고 데이트 하는 사진이다.

임씨는 "몸도 힘들고 돈도 아깝다"고 했다. 그는 작년에 취업해 저축이 얼마 없다. 그런데도 1500만원어치 예물을 주고받고, 이른바 '스드메'(스튜디오 촬영·드레스 대여·메이크업)에 여자친구랑 둘이 합쳐 280만원을 썼다. 여자친구가 원하는 대로 촬영용 드레스를 한 벌 더 빌리고, 결혼반지 외에 팔찌와 목걸이도 추가로 구입했다. "솔직히 그 돈 아껴서 살림에 보태고 싶죠. 하지만 일일이 따져봤자 싸우기만 하고 뭐가 달라지겠나 싶었어요."

취재팀이 만난 신랑들 중에는 신혼집·예단을 뺀 나머지 대부분을 여자친구 뜻대로 했다는 사람이 많았다. "아깝지만, 여자들은 결혼식에 집착이 강하니까 그냥 따라갔다"고 했다.

지난 4월 결혼한 회사원 김희준(가명·29)씨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결혼 비용으로 2000만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결혼식 비용 충당하고 500만원은 남을 줄 알았다. "다 썼어요. 여자친구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까…."

여자친구는 서울 강남 A 웨딩홀을 마음에 들어 했다. 신부가 대기실에 있다가 복도를 지나지 않고 곧바로 홀에 입장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다른 웨딩홀보다 밥값이 1인당 5000원쯤 비쌌지만, 결국 거기서 했다. "여자친구가 '나 자신이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하길래…."

평일에 연차 내고 웨딩드레스 가게도 따라갔다. "여자친구가 '주말에 가면 빠진 물건이 많다'고 하길래…. 제 역할은 따로 없고 그냥 여자친구가 1시간 동안 드레스 서너 벌 갈아입을 때 옆에서 '우아! 우아!'를 반복했어요." 여자친구는 국산보다 100만원 비싼 수입 드레스를 골랐다. 그는 속으로 '어떤 하객이 남의 드레스를 무늬까지 자세하게 보겠나' 했다. 싸울까 봐 아무 말 안 했다.

딱 한 번 반대 의사를 밝힌 항목이 스튜디오 촬영이었다. 그가 "그걸 도대체 왜 하고 싶으냐?"고 묻자, 여자친구가 "너는 왜 안 하고 싶은데?" 했다. 친구들도 다들 SNS와 블로그에 드레스 입은 사진을 띄우고 서로 감탄해준다고 했다. 결국 여자친구 뜻대로 했다.

신랑들은 "업체도 그런 점을 훤히 안다"고 했다. "웨딩박람회에 가면 업체 직원들이 예비 신부만 쳐다보고 얘기해요. 대놓고 '신랑님은 이런 거 잘 모르세요' 하기도 하고요. 신랑은 '들러리' 아니면 '투명인간'이죠."(대학원생 정석훈·가명·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