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돈을 풀고 있음에도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글로벌 '돈맥경화' 현상이 전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지난 9일 국제통화기금(IMF)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과거 일본의 장기 침체를 야기했던 저물가 현상이 유로존에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빈약한 성장의 시대가 올 우려가 있다"고 말해 돈이 돌지 않아 얼어붙은 글로벌 경제에 대해 경고했다.
◇미국 "대공황 때보다 돈 안 돌아"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최근 미국에서 주택 담보대출을 갈아타려다 거절당했다. '은퇴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대출 시장이 돈을 제대로 풀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부실 대출로 은행들이 파산하는 것을 목격한 미국 금융회사들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하면서 연준이 푼 돈은 시장으로 흘러들지 않고 있다. 연준이 양적완화를 통해 3조4000억달러를 찍어 뿌렸지만, 이 돈 중 상당액은 시중은행들의 지급준비금 형태로 연준 '창고'에 그냥 쌓여 있다. 현재 미 연준에 쌓여 있는 시중은행들의 지급준비금은 2조7000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매월 경신 중이다.
연준이 푼 돈이 제대로 돌지 못하면서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인 돈의 유통속도는 대공황기(1920~1930년대) 때보다도 낮아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미국 돈의 유통속도는 1.5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2.0보다 25% 줄어든 수치다.
'돈의 정체(停滯)'는 물가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8월 마이너스 0.2%를 기록하는 등 지난 29개월 동안 연준의 목표치인 2.0%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유럽 "물가야, 제발 올라라"
유럽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달 '마이너스 금리'라는 초유의 대책을 내놓았지만 유럽 경제에 돈이 돈다는 신호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지난 15일 발표된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의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0.3% 상승하는 데 그쳤다. 3년 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수치로, ECB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목표치(2.0%)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슬로베니아·슬로바키아 등 5개 나라에선 물가가 오히려 하락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물가가 더 떨어지리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은 소비를 계속 미루고 있다. 이대로라면 유로존에서 디플레이션(deflation·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했다.
ECB 드라기 총재는 지난달 "만약 물가상승률이 계속 낮게 머문다면 다른 수단을 동원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 미국 스타일의 양적완화에 나설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단순한 돈 풀기가 제대로 된 돈의 유통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中, 규제 완화에도 '싸늘'… 日, 아베노믹스에도 '꽁꽁'
양적완화와 제로 금리 정책을 동시에 추진 중인 일본에서도 돈이 돌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돈의 유통속도는 사상 최저인 0.57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고 지난달 말 발표한 8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소비세 인상 효과(2%포인트)를 제외하면 1.1%에 머물렀다. 일본 정부가 설정한 목표치인 2%를 한참 밑도는 수준이다. 1분기 6%(연율 기준)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 역시 2분기엔 마이너스 7.1%를 기록하며 다시 고꾸라졌다.
세계경제의 '마지막 지갑'으로 여겨지는 중국에서도 돈이 돌지 않고 있다는 징후가 보인다. 2분기 중국 경제성장률은 사상 최저치인 7.3%를 기록했고 1~8월 부동산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9%가 줄었다.
'글로벌 돈맥경화'의 가장 큰 문제는 중앙은행들이 추가로 동원할 '도구'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질리언 테트는 "중앙은행들은 금융위기 이후 7조~10조달러에 달하는 돈을 쏟아부었지만 돈은 그저 거기 있을 뿐 제대로 돌지를 않는다. 돈이 넘치는데도 경제가 얼어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세계경제가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