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도 못하던 아이 걷게하는 '유전자 치료'… 한국은 검사부터 規制

입력 2014.10.22 02:55

[희귀병·癌 고치는 '미래 의학의 꽃' 유전체 의학… 국내선 연구用일 때만 허용]

- 문제 유전자 찾아 '맞춤 치료'
뇌암 수술에도 회복 안된 환자 암 조직서 '변이 유전체' 발견
폐암치료제 처방하자 증세 완화… 근육병엔 신경 전달 물질 처방
"유전체 검사는 할 수도 없고 치료제도 마음대로 못 써… 연구로 증명된 효과 반영 못해"

열한 살 보경이는 태어나서 올해 초까지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었다. 희귀 질환인 선천성 근무력증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유전자 변이로 근육과 신경 연결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체중이 늘어난 다섯 살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휠체어에 의지하며, 누군가 앉혀주면 앉아 있는 정도였다. 화장실 갈 때마다 엄마가 들어서 옮겨줘야 했다. 경북 안동에 사는 보경이 가족은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석 달마다 네 시간 자동차를 타고 서울대병원 소아신경과 채종희 교수를 찾았다. 엄마는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좋아지는 치료법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소망대로 보경이에게 어느 날 '기적'이 찾아왔다.

채 교수는 지난해 말 아이 혈액과 유전자 검사 자료를 미국 워싱턴대 의대 소아과 유전체 분석 연구소 한시훈(재미 한인 의학자) 소장에게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희귀 질환과 관련된 500여개의 유전자를 한 번에 찾아보는 기법이다. 거기서 'DOK7 유전자' 변이가 발견됐다. 이런 경우 신경 전달 물질인 아세틸콜린 기능을 강화하면 효과가 있다. 이에 채 교수는 올해 1월부터 아세틸콜린 농도를 높이는 약물을 투여했다. 그러자 지난 6월부터 보경이가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지금은 화장실을 혼자서 걸어서 갈 수 있고, 계단도 난간을 붙잡고 오를 수 있게 됐다. 평생 앉아만 있을 아이의 운명을 유전체 의학이 바꿔놓은 것이다. 채 교수는 "이런 선천성 근무력증 연구와 치료는 앞으로 노인성 근무력증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천성 근무력증으로 11세가 될 때까지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는 어린이 환자가 유전체 분석으로 치료를 받은 뒤 걷게 되면서 계단을 오르고 있다. 오른쪽은 주치의인 서울대병원 소아신경과 채종희 교수
선천성 근무력증으로 11세가 될 때까지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는 어린이 환자가 유전체 분석으로 치료를 받은 뒤 걷게 되면서 계단을 오르고 있다. 오른쪽은 주치의인 서울대병원 소아신경과 채종희 교수. /윤동진 기자
또 다른 '기적'은 삼성서울병원에서도 일어났다. 65세 여성 뇌암 환자는 악성 다발성 뇌신경 교종을 앓았다. 수술로 암 덩어리 일부를 제거했으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걷지도 못한 채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신경외과 남도현 교수는 환자의 뇌암 조직 유전체 분석을 시행했고, 거기서 암 성장을 촉발하는 요소(EGFR)가 과발현된 것을 찾아냈다. 의료진은 최근 폐암 치료제로 나온 '아파티닙'이라는 약물이 이를 차단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지난 3월부터 이 약물을 투여했다. 그 결과 뇌암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환자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환자의 특정 유전자 변이를 찾아내 족집게 치료를 하는 유전자 의학이 속속 놀라운 효과를 보이고 있다. 같은 질병에는 같은 약물을 쓰던 기존 의학이 환자 맞춤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성균관 의대 유전체연구소 박웅양 소장은 "폐암, 대장암, 유방암, 피부암, 에이즈, C형 간염, 관상동맥질환 등 환자에게 질병을 일으킨 특정 유전자만 차단하는 치료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며 "같은 질병이라도 어떤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치료법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유전자 정보를 이용한 진단·치료 사례 정리 표

그러나 국내에서는 지나친 규제와 제도 미비로 미래 의학의 꽃인 유전체 의학이 보다 활성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폐암 환자에게서 발견된 특정 유전자 변이를 고칠 약물이 대장암 치료제에 있어도 환자에게 그 약물을 쓸 수가 없다. 국민건강보험에 등재된 폐암 치료제 목록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 목적 외에는 환자의 유전체 검사를 할 수도 없다. '기적'을 일으킨 두 사례는 병원이 연구비를 써가며 시도했기에, 임상시험으로 허가받았기에 가능했다.

미국에서 유방암 환자 6만여명이 받는 유방암 관련 유전자 변이 검사도 국내에 허용되지 않고 있다. 국내 임상시험 자료가 없다는 이유다. 유전자 분석을 하면 유방암 10개 중 4개는 치료 방침이 환자별로 바뀐다는 게 의학계의 평가다. 이 때문에 국내 일부 암 환자는 자신의 암 조직 검체를 미국 유전자 회사에 보내 분석을 의뢰하기도 한다. 산모의 혈액으로 태아의 유전자 결함을 분석하는 기형아 산전 진단법도 국내에서 쓸 수 없다. 일부 산모는 중국이나 미국으로 검체를 보내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유전체연구소 안성민(종양내과) 교수는 "이제는 암이 어느 장기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유전자 변이로 발생했느냐가 치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각종 유전자 분석을 활성화하고 이를 근거로 맞춤형으로 약물을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전자와 유전체

유전자(gene)는 날 때부터 세포의 핵 속에 지녀서, 각종 생명 활동을 작동케 하는 유전정보(DNA) 구성단위다. 인간은 약 2만5000개의 유전자가 있다. 유전체(genome)는 유전자와 세포핵 속 염색체, 유전자를 조절하는 요소 전체를 통칭해 부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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