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평범한 소년의 12년… 매 순간 특별했네

조선일보
  • 이태훈 기자
    입력 2014.10.17 03:04 | 수정 2014.10.17 03:33

    보이후드

    "아빠, 세상엔 마법 같은 거 없죠?"

    이혼한 뒤 격주 주말만 자신과 누나를 데리러 오는 아빠에게 소년은 묻는다. "그러게. 마법이나 요정 같은 건 없지만 말야, 고래를 생각해 봐. 음파로 노래하고, 핏줄은 수도관처럼 굵다잖아. 그게 더 마법 같지 않니?" 소년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쳐다보고, 빌딩 사이 햇빛에 잠깐 눈이 부시다.

    인생은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순간들이 더해져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자라고, 늙고, 변해간다. 누구도 이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 영화가 삶의 순간을 포착해내는 마법이라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신작 '보이후드(Boyhood)'는 아마도 지금껏 극영화가 표현하려 애썼던 이 마법의 실제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로 두터운 팬층을 가진 링클레이터는 늘 평범한 순간이 품은 의미를 붙잡는 데 놀라운 재능을 보여왔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다.

    ‘보이후드’는 여섯 살 소년이 실제 12년 동안 성장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보이후드’는 여섯 살 소년이 실제 12년 동안 성장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2002년 링클레이터는 여섯 살의 평범한 텍사스 소년 엘라 콜트레인을 이 영화의 주인공 메이슨 역에 캐스팅했다. 에단 호크를 아빠로, 파트리샤 아퀘트를 엄마로, 또 감독 자신의 딸 로렐라이를 누나로 뽑았다. 그 뒤 12년간 이들은 매년 여름마다 만나 단 몇 장면만을 함께 찍었다. 12년이 지난 작년, 이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는 '보이후드'라는 영화로 태어났다.

    소년의 삶은 평범하다. 좋은 시절과 끔찍한 시절이 엇갈린다. 이사와 가족의 다툼을 겪고, 엄마는 두 번 재혼하며, 낯선 도시 새로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첫사랑 소녀는 운동선수 대학생과 바람이 난다. 놀이터 곁 땅속에 반쯤 썩은 새의 시체, 동네 형들과 들여다보던 성인 잡지의 속옷 모델들, 유리 등잔, 붉은 소화전, 노란 신호등…. 화면이 잠깐 암전한 뒤 밝아질 때마다 소년은 부쩍 자라고, 관객은 소년의 순간 위로 자신이 지나온 생의 순간들을 겹쳐보게 된다. 알코올 중독 계부의 폭력을 피해 도망쳐 나올 때 불평하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소리친다. "뒤돌아보지 마. 나도 X같은 거 안다고!(I know it sucks!)"

    보험계리사 일을 시작한 친아빠에게 딸이 "아빠는 뮤지션 아니었어?" 하고 묻자 아빠는 답한다. "맞아. 하지만 인생은 비싼 거야. 늘 책임이 따르지." 12년이 지나 보송보송 솜털 소년은 사진가를 꿈꾸는 '훈남' 청년으로 자랐고, 철부지 아빠는 넥타이 맨 배 나온 회사원으로 늙었다. "사람들은 '순간을 잡으라'(seize the moment)고 하잖아. 근데 말야, 나는 그 순간들이 우리를 붙잡는 것 같아."

    삶의 평범한 본질이란 얼마나 비범한 것인가. 166분의 상영 시간 내내 그 모든 순간이 가슴 저리고, 또 아름답다. 23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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