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最高 철학자는 터미네이터

조선일보
입력 2014.10.11 03:01

[영화·드라마 통해 '철학하기']

인식론·존재론 등 어려운 철학 이론… SF영화 10편과 접합해 쉽게 풀어내
미드 '하우스'는 20명이 다르게 해석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왼쪽), '하우스 박사와 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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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철학자가 달린다' 같은 대중적 철학서로 유명한 철학자 마크 롤랜즈(마이애미 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20세기 오스트리아가 배출한 최고의 철학자는 아널드 슈워제네거다. 잠깐. 슈워제네거라면 '터미네이터'와 '토탈 리콜' 같은 영화로 이름을 떨친 할리우드 액션 스타 아니던가.

그가 설마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나 칼 포퍼, 프로이트보다 위대하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고개를 갸웃거릴 즈음, 롤랜즈는 정색하고 슈워제네거가 "의심할 여지 없는 할리우드 철학계의 거물"이며 "농담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영화 '토탈 리콜'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인격동일성(人格同一性)의 개념을 보여줬고, '마지막 액션 히어로'에서는 SF 영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세계도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가능세계(可能世界)를 탐구했다는 것이다. '트윈스'는 본성과 양육 가운데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인을 연구한 작품이며, '터미네이터'는 미래 인류의 지도자를 제거(terminate)하기 위해 파견된 사이보그를 통해 육체와 마음 사이의 이원론(二元論) 문제를 고찰한 영화다.

입심 좋은 이 수다쟁이 철학자가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같은 SF 영화 10편을 통해 인식론과 존재론, 도덕론의 문제들을 고찰한 책이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롤랜즈 지음·책세상)다. '론(論)'자만 뒤에 붙으면 뒷골이 쑤신다는 불평일랑 잠시 접어놓아도 좋다. 저자가 제안하는 철학은 '데칸쇼(데카르트·칸트·쇼펜하우어)'의 골치 아픈 원서를 펴놓고 머리를 싸매는 것이 아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전자레인지에서 팝콘을 튀긴 다음, 편안히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아서 사상자가 도처에 즐비하며 외계인에게 고난을 겪고 로봇이 왕창 다 때려 부수는" SF 영화를 보면서 철학을 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 호기롭게 'SF 철학'이라는 이름까지 붙인다.

이 책의 재미는 비단 철학과 영화라는 이질적인 장르를 절묘하게 접합시킨 솜씨에만 그치지 않는다. 때로는 "염병할"이나 "제기랄" 같은 비속어와 음담패설, 육두문자와 조롱까지 섞어가면서 저자는 우리가 알아들을 때까지 복잡한 철학적 문제를 설명해준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아널드 슈워제네거.
영화 '터미네이터'의 아널드 슈워제네거.
이를테면 토머스 홉스가 주창한 사회계약론의 전제인 '자연상태'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두 더럽고 악랄한 욕심쟁이에다가, 더 말할 것도 없이 자기밖에 모르는 하잘것없는 쓰레기들"이라고 해설하는 방식이다. "인간을 단지 수단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 대목에서 저자는 "그것은 사람을 꼭두각시, 들러리, 봉, 장기판의 졸, 수족, 끄나풀, 머슴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가 철학자 한 명이 SF 영화 여러 편을 본 뒤에 쓴 '개인전(個人戰)'이라면, '하우스 박사와 철학하기'(헨리 제이코비 등 지음·숲속여우비)는 거꾸로 여러 철학자가 미국 드라마(미드)를 한 편 본 뒤에 쓴 글들을 모은 '단체 경기'에 가깝다.

이 책의 주제가 된 '하우스'는 미국에서 시즌 8까지 방영되며 인기를 누렸고, 한국에서도 마니아들에게 컬트(숭배나 찬사)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던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하우스는 환자의 병명을 진단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약물중독자인 데다가 병원 규정은 덮어놓고 무시하는 괴짜 의사다. 이를테면 하우스는 '의사 가운을 입혀놓은 셜록 홈스'다.

의사가 환자의 병명을 진단하듯, 미국·캐나다의 철학·종교연구학 교수 등 공동 저자 20명은 각자의 전공 과목에 따라 '문제적 인물' 하우스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한다. 실존주의를 전공한 철학자에겐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병동이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주장한 사르트르 철학책 속의 세상처럼 보인다. 선(禪)불교를 전공한 종교연구학 교수에게 하우스 박사의 말투는 "선불교의 표현방식과 유사"하게 들리지만, 반대로 과학사와 철학 전공자에게는 문답을 통해 진리를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하는 소크라테스의 화법과 닮은 듯이 보인다.

가끔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다채로운 주장이 담긴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철학은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 그 자체를 위해 공부하는 학문"이라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 떠오른다. 검색 한 번이면 답이 튀어나오는 세상에 답답하기 그지없는 정의(定義) 같지만, 러셀은 이 말을 빼놓지 않았다.

"이런 질문이 가능성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지적인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며,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독단적인 자신감을 줄여준다." 이번 주말엔 맥주와 팝콘과 함께 SF 영화나 미드를 보면서 이 책들을 참고서 삼아 철학을 해보는 건 어떨까.


[아널드 슈워제네거 영화 속 철학적 주제들]
-자료: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토탈 리콜
'토탈 리콜'
시간의 흐름에도 동일한 자아라는 걸 어떻게 인식하는가 (인격 동일성)






마지막 액션 히어로

SF 영화와 같은 상상의 세계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가 (가능 세계)


터미네이터

사이보그도 인간처럼 영혼이나 지성을 가질 수 있는가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


6번째 날
'6번째 날'
기억까지 이식한 복제 인간은 우리와 같은 존재인가 (분열·복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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