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권투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선일보
  •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2바이올린 부수석 김정민
  • 김도원
    입력 2014.09.18 05:46

    김정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2바이올린 부수석
    김정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2바이올린 부수석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집에 살 때, 아래층에는 바이에른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가 살았다. 가끔 엘리베이터 탈 때나 자전거를 세워놓은 지하 주차장에서 마주쳤다. 어느 날, 극장에서 공연하고 나오는데 마침 주역 발레리나도 꽃다발을 안고 나오는 참이었다. 금세 얼굴을 못 알아볼 만큼 화장을 많이 했지만 아랫집 이웃이라는 걸 갑자기 깨달았다. 그쪽도 동시에 나를 알아봐서 멋쩍게 인사를 했다.

    물론 춤을 어지간히 잘 추는 사람이었겠지만 내가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건 지하 주차장에 오토바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리 데이비슨은 아니라도 꽤 덩치가 크고 거친 느낌의 오토바이였다. 그 몸집도 작고 하늘하늘하고 여성답게 생긴 발레리나가 가끔 가죽 재킷과 바지 차림에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몰고 나갔다. 그럴 때 마주치면 약간 부끄러워하는 눈치였다.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몸으로 표현하는 발레를 위해, 가끔씩 아주 다른 것도 필요하다는 것, 그래야 정신의 균형이 깨지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직접 봤다.

    일 년 반이 넘게 권투를 하고 있다. 내가 권투를 한다면 다들 믿기지 않는 듯한 눈치다. 왜 하필이면 권투냐고 묻기도 한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뒤늦게 보고 엉엉 울었고, 두 번을 더 보고 나서 권투를 배우러 갔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때 오토바이를 타는 발레리나를 봤기 때문에 권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훈련할 때마다 딱 3분간 링에 올라가는데(권투의 한 라운드가 3분이다) 솔직히 너무 힘이 들어 매번 다시는 권투 안 한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잘하지도 못하는 권투를 아직 놓지 못하는 건 권투 하는 사람인 척이라도 하고 싶어서다.

    [일사일언] 권투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름답기 위해선 강해야 하는 법이다.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선 지혜로워야 하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난 싸우기까지는 못해도 물러서지 않기 위해 권투를 한다. 링에서는 물러서봐야 갈 데도 없다. 너무 진부한 말이지만 링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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