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유도 선수로 국제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는 30대 A씨는 10년 전 대학을 졸업하면서 은퇴했다. 새 직업으로 경호원을 선택했다. 선수 시절에 관련 아르바이트를 몇 차례 해봐서 경험이 있었고, 꼼꼼한 성격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장차 청와대 경호원이 되는 꿈도 조금씩 이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방 근무가 대부분이었고, 정기적인 수입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A씨는 학창 시절 은사의 권유로 고향의 한 중학교에서 유도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코치직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월수입 200만원 안팎에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했다. 결국 A씨는 코치 6년째엔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이후 생활정보지 구인 코너를 뒤적이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갔다. 요즘 새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A씨는 "고교 졸업 후 운동을 그만두고 곧바로 취업해서 경력을 쌓았더라면 지금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A씨는 본지와 대한체육회가 실시한 '은퇴 후 10년' 설문 조사에 응한 66명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응답자들의 답변 속에서도 새 인생 설계에 어려움을 겪는 운동선수 출신들의 고단한 현실이 드러났다.
◇새 진로 이끌어줄 시스템 없어
배구 선수였던 B(30)씨는 10년 전 은퇴하고 고교 코치로 잠시 일했다가 지인의 소개로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적성이 맞지 않았다. 이후 선배의 소개를 받아 자동차 회사 생산직 근로자로 일했다. 5년 전엔 모교에 이력서를 내고 다시 고교 배구 코치로 돌아왔다. 계약직이라는 신분에 낮은 수입을 감수했다. 그는 "다른 일들을 해보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유도 선수였던 C(30)씨는 반대의 경우다. 은퇴하고 나서 초·중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했고 도장 사범으로도 일했던 그는 3년 전 완전히 유도계를 떠났다. 요즘은 제철소 취업을 목표로 크레인 운전을 배우고 있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계약직인 코치는 평생 직업으로 삼기 어렵지 않으냐"는 설명이었다.
본지와 대한체육회 조사에 응한 선수 66명 중 현재 스포츠 관련 직종(코치·체육 교사·스포츠 시설 운영·스포츠 행정직 등)에서 근무 중인 응답자는 26명(39%)뿐이었다. 60% 이상이 스포츠와 무관한 일을 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의 추천·소개로 현 직업을 갖게 됐다는 사람이 24%였다. 은퇴 후 진로 설정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이 부족하다 보니 알음알음으로 일자리를 찾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전북의 한 대학에서 정규직 교직원으로 일하는 스키 선수 출신 D(37)씨는 일찍 진로 준비를 시작해 성공한 사례다. 2003년엔 선수 등록만 한 상태에서 교육대학원에 들어갔고, 2004년 은퇴했다. 2006년엔 석사 학위를 땄다. 그는 "어렸을 땐 국가대표로 뽑히는 친구들을 보고 부러웠는데, 요즘은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한 내가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많고 고용 불안 심각
응답자 중 은퇴할 때 희망했던 직업을 현재 가진 사람은 29%(19명)였다. 원했던 직업을 갖지 못한 이유로는 '취직이 되지 않아서'(9명), '원했던 직업을 가져봤으나 환경이 열악해 포기'(7명) 등을 들었다.
응답자 3명 중 1명은 비정규직(21명·32%)이었다. 정규직이 25명(38%), 자영업이 13명(20%)이었다. 코치로 일한다는 11명 중 10명이 비정규직 신분이었다. 현재 직장에 다닌 기간이 3년 미만이라는 응답자는 4명 중 1명꼴(17명·26%)이었다. 10년 동안 두 차례 이상 직장을 옮긴 사람이 20명(30%), 2년 이상 무직을 경험한 사람이 12명(18%)이었다. 그만큼 고용이 불안하다는 뜻이다.
실업팀 축구 선수를 그만두고 경남의 한 중학교에서 8년째 감독으로 일한다는 E(35)씨의 수입은 월 200만원대. 퇴직금이 없어 노후 준비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는 "초등학교 코치부터 시작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니 늘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대택 국민대 체육학과 교수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운동 하나로 먹고살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국가와 기업의 지원도 줄어들었다"며 "단순한 지원책 몇 가지로 해결하기보다는 법과 인식을 개선하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조사했나]
체육회 DB 저장 3895명 전원에게 일일이 전화… 66명만 조사에 응해
본지와 대한체육회는 은퇴한 지 10년 된 선수들을 대상으로 지난 11일부터 2주 동안 공동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2004년 은퇴(당시 나이 19세 이상)한 선수가 대상이었다.
은퇴 선수 정보는 2004년에 처음 전산화됐다. 당시 전체 은퇴 분류 선수 2만1869명 중 3895명(일부 종목·프로 선수 제외)의 연락처가 대한체육회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됐다. 전산화 첫해여서 종목별 협회가 선수 정보를 취합한 뒤 체육회가 일괄 등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3895명 전원에게 전화를 걸어본 결과 183명하고만 연결이 됐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화번호가 바뀌거나 없어졌기 때문이다. 연락이 닿은 183명 중 66명(27개 종목)이 조사에 응했다.
종목별로는 축구(15%)가 가장 많았고 연령별로는 30대(71%)가 최다였다.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가 1명, 국가대표 출신 8명, 상비군 출신이 1명이었다.
2012년부터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선수들이 직접 자신의 정보를 등록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또 은퇴 선수를 관리하는 대한체육회 선수권익보호부가 은퇴 선수 지원 포털 가입자, 혹은 은퇴 선수 지원 사업 수혜자의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이 때문에 대한체육회 데이터베이스는 정확도가 크게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는 물론, 종목별 협회에서도 전산화 초기에 은퇴한 대다수 선수의 연락처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