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 화면 캡처

법원이 2012년 이정희(45) 통합진보당 대표에 대해 종북(從北) 의혹을 제기한 정치평론가 변희재(40)씨에게 "명예훼손"이라며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린 데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서울고법 민사13부(부장판사 고의영)는 지난 8일 이 대표와 그의 남편 심재환(56) 변호사가 "종북·주사파·경기동부연합 등의 표현으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변 대표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변 대표는 이 대표 부부에게 1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변씨는 2012년 3월 21~24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이 대표 부부가 당시 종북 논란의 중심에 있던 경기동부연합과 관련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1심과 2심 법원은 변씨에게 이 대표 부부에 대한 명예훼손 책임이 있다며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대표가 이끄는 통합진보당에 대해 정부가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고, 북한을 추종하는 위헌 정당"이라고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하는 등 이 대표의 종북 성향 논란은 국민들 사이에서 현재 진행형인데도 재판부는 이런 사회적 공론(公論)을 무시한 채 종북 의혹 제기가 무조건 위법이라는 식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해 고영주 변호사(전 서울남부지검장)는 "공당(公黨) 대표의 발언과 행동에 의문을 제기한 것에 대해 명예훼손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앞으로 정치인에 대한 검증을 하지 말라는 얘기와 같다"며 "종북이란 용어 자체가 민노당이 갈라질 때 심상정·노회찬 같은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종북'이라고 해서 나온 말인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 판사가 그들보다 더 잘 안다는 얘기냐"고 했다.

이정희, 이석기 두둔 시위… 지난 9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구속자 무죄석방 촉구 민주찾기 대행진’에 참가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앞줄 오른쪽 끝)와 김재연 의원 등이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이석기 의원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판사 출신인 동국대 법학과 방희선 교수는 "좌파 사람들은 우파를 수구 꼴통, 파쇼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불렀다고 처벌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면서 "법원이 판결할 때 진보적 가치에 좀 관대하고, 보수적 가치에는 엄격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번 소송에서 패소한 변희재씨는 "지금껏 종북이란 표현을 사용해 온 언론사와 네티즌 전부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라며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말했다. 변씨는 "항소심 재판부가 마음대로 '종북'의 뜻을 '조선노동당을 추종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우린 통일 정책과 관련해 북한의 정책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종북으로 지칭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통진당과 종북으로 검색해 보니 기사만 1만8000개가 나왔다. 그들 모두에게 법원 기준에 따라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통진당만 떼돈 벌게 하는 일"이라 했다.

법조계에선 "'종북'이나 '주사파'라는 비판이 명예훼손이라면, 좌파들이 우익 인사에 대해 자주 말하는 '친일파'니 '반민족주의자'니 하는 말도 똑같이 명예훼손이라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나아가 변씨의 주장을 인용한 언론사에까지 손해배상 책임을 물었다. 변씨의 주장을 인용 보도한 조선일보와 인터넷 매체에 대해서도 "각각 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언론학자들은 "권력을 견제하고 공인(公人) 이념이나 성향 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언론의 고유 기능을 무시한 판결"이라고 했다.

이민웅 한양대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종북이라고 하면 북한을 추종하고 편을 드는 정도로 생각한다"며 "재판부에서 일반이 생각하는 것보다 종북의 의미를 과하게 해석한 토대에서 판결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완수 동서대(언론학) 교수는 "종북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전적 말이 아니라 미디어가 만들어낸 대중적인 언어"라며 "북한을 보편적으로 지지하고 이를 옹호하거나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집단 또는 사람에게 쓰는 대중적인 용어인데, 법원이 미디어의 기능을 간과하고 있다"고 했다.

법조계에서는 당장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공당 대표에 대한 정당한 의혹 제기와 이를 보도한 언론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게 되면 결과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종북 논란은 별개로 하더라도 공인에 대해 광범위하게 제기된 의혹을 인용한 보도에 대해서도 명예훼손 책임을 묻는 것은 감시 기능으로서 언론의 역할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통진당 해산 심판을 청구한 정부도 명예훼손으로 몰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고영주 변호사는 "종북을 종북이라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대법원 판례에도 정치인 같은 공인에 대해선 사실을 적시하면 위법성이 조각되고, 허위 사실이더라도 공익 목적을 위해 쓴 경우에 위법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판결은 이 대표가 종북이 아니라는 전제로 깔고 내린 판결로 보인다"면서 "이 대표는 그간의 보도나 정부의 위헌 정당 심판을 받고있는 정당의 대표라는 점에서 종북 성향을 띠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법원이 언론에 대해서는 책임을 인정하면서 정치인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한 것도 의문이다. 당시 새누리당 선대위 대변인이었던 이상일 의원은 이정희 대표를 겨냥해 "경기동부연합에 대해 모른다고 했지만, 그의 남편 심모 변호사도 이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게 정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대표 부부는 이상일 의원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고, 1심 법원은 이상일 의원에게 800만원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정당의 특성상 어느 정도 과장되거나 수사적 표현은 허용할 수 있다" "정당과 정당인의 표현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며 불법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했다.

가상준 단국대 교수는 "정당인은 써도 되고 언론인은 쓰면 안 된다는 것은 법원이 이중 잣대를 댄 것 아닌가 생각된다"면서 "전문가들이 TV토론에 나가서도 그 사람들에 대해선 그렇게(종북이라고) 부르는데 거의 전 국민이 쓰는 말에 대해 언론사에 책임을 전가하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발언의 정치·사회적 파급 효과나 영향력을 따져봤을 때 정치인에게 더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도 정치인이라고 봐주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