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문맹(漢字文盲) 벗어나자] "한국어, 漢字 알고나니 이제야 보이더군요"

    입력 : 2014.08.04 03:00

    [16] 외국인 유학생, 한자 공부해보니

    일상어부터 전문용어까지 이해 수월, 신문·방송 뉴스 정보 습득 빨라져
    경로효친·과유불급… 전통 이해도

    지난달 28일 서울 한국어문회관에서 열린 학술강연회에서 폴란드인 아그네스카 상보르스카씨가 강연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한국어문회관에서 열린 학술강연회에서 폴란드인 아그네스카 상보르스카씨가 강연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한자를 공부하지 않는 외국인도 한국어를 배울 수야 있겠지요. 하지만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한자를 배우면 한국 사회와 역사·문화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일상어도 정확하고 빠르게 알아듣게 됩니다."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하는 유럽인 여성은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폴란드인 아그네스카 상보르스카(Agnieszka Szamborska)씨였다. 그녀는 지난 28일 한국어문회(이사장 김훈)가 주최한 학술강연회 '한자문맹(漢字文盲)이 낳은 우리말과 글의 폐해(弊害)'에 참석해 '외국인 학습자 눈으로 본 한자교육의 이점(利點)'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녀는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에게도 한자 교육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①"일상어도 전문용어도 한자어"

    상보르스카씨는 "특히 한국에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는 학생일수록 한자 습득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전문적인 용어일수록 축약력(縮約力)이 높은 어휘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학원에서 과제를 준비할 때 유심히 봤더니, 문장에 어울리는 한자어를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내용 전달에 어려움이 있더군요." '고찰(考察)할 것이다' '규명(糾明)할 것이다' '모색(摸索)함이 목적(目的)이다' '언급(言及)한 바와 같이' '~의 근거(根據)로' 같은 표현은 한자어의 뜻을 반드시 알아야 했다.

    한자를 알고 나니 한국어 어휘들의 뜻도 훨씬 쉽게 다가왔다. 접두사 '생(生)-'의 뜻을 알고 나니 '생방송(生放送)' '생존경쟁(生存競爭)' '생전(生前) 처음'이 어떤 의미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골치 아픈 동음이의어들도 한자를 알고 나니 무릎을 칠 정도가 됐다. '금융자산 10억 이상 부자'와 '청소년 캠프로 부자 간 소통'에서 앞의 '부자(富者)'와 뒤의 '부자(父子)'가 확연히 구분됐다. '성인(成人)'과 '성인(聖人)' '연패(連敗·잇달아 짐)'와 '연패(連覇·잇달아 이김)'가 어떻게 다른지도 알게 됐다. 외국인 학습자들이 슬럼프를 겪는 이유는 오히려 한자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자 모르는 외국인은 구별 못하는 동음이의어 예문 정리표

    ②"한자 모르고 한글만 보면 정보 놓쳐"

    그러다 보니 '한자를 모르고서 어떻게 한국에서 생활을 할 수 있나'란 의문이 들 정도로 일상생활에서도 한자어는 중요했다. "한자어는 게시판이나 광고에서도 많이 쓰이더군요. 한자어를 모르면 중요한 정보를 놓칠 수도 있어요."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막론(莫論)하고' '사내(社內) 연수(硏修)' '임시(臨時) 채용(採用)'처럼 한자의 뜻을 알면 암호문 같던 한글 표기의 내용도 술술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인 학습자가 한국어 능력을 발전시키려면 신문을 구독하거나 방송 뉴스를 시청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한자어는 곳곳에서 등장했다. 〈말레이기 피격, 미·우크라이나 '반군 격추증거' 잇단 제시〉란 뉴스 제목에선 '被擊(피격)' '叛軍(반군)' '擊墜證據(격추증거)' '提示(제시)'가 무슨 뜻인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었다.

    ③"한국 문화 이해에도 한자는 필수"

    한국의 전통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한자는 중요했다. 그는 "서울 한양도성을 여행할 때, 이 도성이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구성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4대문과 보신각의 이름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각각 한 글자씩 들어가는데, 한자를 모른다면 이 같은 한국 전통 사상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 문화 공부에는 '사자성어'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비(非)한자권 외국인 학생에게는 익히기가 하늘의 별 따기일 정도로 어려운데요. 한자 학습의 필요성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상보르스카씨는 한자를 공부한 결과 이제 한국어로 일상 대화를 하다가도 '경로효친(敬老孝親)' '유비무환(有備無患)'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같은 사자성어를 자유자재로 섞어 쓰는 경지에 이르렀다.

    상보르스카씨는 "일상생활 속에서 한자어를 익힌 한국인들은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어휘를 응용할 수 있다"며 "하지만 요즘 한국 젊은이들을 보면 (한자를 몰라) 이런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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