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의 성(聖) 마르코 공동묘지에는 최근 세르비아계 추모객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보스니아는 이슬람 신자인 보스니아계 약 50%,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약 30%,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계가 약 15%인 다민족 국가다.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는 1992년부터 3년간 내전을 벌였다. 당시 세르비아계 군인이 보스니아계 8000여명을 집단 사살하는 등 내전 중 양측에서 수만명이 전사했다.
이 공동묘지의 성당 입구에는 '성 비투스의 날 영웅들'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비문의 맨 처음에 적힌 이름은 가브릴로 프린치프(1894~ 1918·사진). 100년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를 총으로 암살한 세르비아계 청년의 이름이다.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총성
1914년 6월 28일 발칸반도의 패자(覇者)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페르디난트 부부가 식민지였던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당시 발칸 반도에선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 반대하는 범(汎)슬라브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했다. 황태자 부부가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사라예보 박물관 앞을 지날 무렵,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1894~1918)가 황태자 부부를 향해 두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황태자 부부는 현장에서 숨졌고, 이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 오스트리아가 이 사건을 빌미로 한 달 후인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프랑스·러시아가 세르비아의 편에 서고,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언하면서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테러리스트인가 영웅인가
프린치프의 추모비 앞에는 '세르비아의 자유와 통일을 위한 죽음'이라고 쓴 종이 쪽지 등이 쌓여 있다. 하지만 이 묘지를 벗어나면 지금도 프린치프에 대한 평가는 민족에 따라서 여전히 엇갈린다. 세르비아계와 대립 중인 보스니아계 주민 하리다 바식(72)은 "그는 테러리스트고 살인마일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세르비아계를 중심으로 '독립을 위한 영웅'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세르비아에서는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처럼 프린치프의 얼굴을 프린트한 티셔츠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려나간다. 주한 세르비아 대사관의 한 외교관은 "그는 세르비아 국민에게 한국의 안중근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세르비아에서는 저격 사건 발생 100주년인 오는 28일 수도 베오그라드 등에서 다양한 학술·문화·종교 행사가 열린다.
프린치프에 대한 상반된 평가 때문에 발칸반도의 해묵은 민족 갈등이 표출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보스니아에서는 보스니아계·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가 민족별로 1명씩 총 3명의 대통령을 뽑고, 이들이 번갈아가며 통치한다. 사라예보에서는 28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기념 음악회가 열릴 예정이지만, 이 행사에 세르비아계 주민은 불참을 선언했다. 그 대신 세르비아계는 사라예보에 프린치프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뉴스위크는 "보스니아 내전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현재 타 민족과의 교류는 더욱 줄어들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