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 눈 안보이면 춤출 수 없단 생각, 뒤집으니 희망이 보였다

입력 2014.06.24 04:18

명상舞 알리는 기업 '춤추는 헬렌켈러'
눈감고 추는 즉흥무, 시각 장애인에 딱 장벽 뛰어넘는 다양한 직업 발굴이 목표

지난 11일 저녁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한 교회 세미나실. 단소, 꽹과리 등 국악으로 어우러진 한국의 가락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하나, 둘, 셋."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는 손을 두어 번 휘젓고, 빠르게 한 바퀴 턴을 했다. 그가 옆 여자의 어깨를 살짝 터치하며 순서를 알렸다. 머리를 곱게 묶은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둥그렇게 올리고, 바닥에서 살포시 뛰었다. 발레 동작과 비슷했다. 즉흥적인 몸짓이지만 음악과 묘하게 분위기가 맞았다. 두 남녀는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었다. 유창호(23·시각장애 3급), 최희정(39·시각장애 1급)씨는 시각장애인 댄서다.

'보이지 않는데 춤을 출 수 있을까.' 예비 사회적기업인 '춤추는 헬렌켈러'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명상무(舞)'를 보급하는 단체다. 이날 연습에 매진하던 시각장애인 5명도 이달 말 '세종과 지화, 춤을 추다!' 공연을 앞둔 명상무 수련생들이다. 명상무는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되 음악이나 연주에 맞추어 자신의 내면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춤이다. 정형화된 안무가 아닌 즉흥무 성격이 강하다. 이 때문에 정안인(正眼人)들도 명상무를 출 때 눈에 까만 두건을 두른다. 시각장애인에게 명상무가 '잘 맞는 옷'인 이유다. 정찬후(43) 춤추는 헬렌켈러 대표는 명상무가 "맹인이 명인(名人)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년 넘게 호흡 명상과 명상무를 지도해온 정찬후 대표가 '시각장애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2009년 그는 석가탄신일 기념 공연에 참가했다가 시각장애인 자녀를 둔 한 어머니를 만났다. 정 대표 본인이 장애인 가족으로 20년을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갔다. 점자 체험 부스에서 만난 어머니는 "시각장애인들은 일상생활 중에 수시로 부딪히고 넘어진다"고 했다. 이 때문에 몸이 경직되고, 긴장의 강도가 높은 편이라는 것. 명상무는 눈을 감고 춤을 출 수도 있고, 근육의 이완과 자세 교정에도 강점이 있었다. 정 대표는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5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해 7월 '춤추는 헬렌켈러'를 설립했다.

춤추는 헬렌켈러가 꿈꾸는 것은 시각장애인에게 명상무를 가르치고, 이 분야가 문화예술 공연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아울러 시각장애인들의 움츠러들고 폐쇄됐던 마음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도록 돕는 것이다. 지금까지 4000여명의 정안인 수련인들이 명상무를 배웠고, 시각장애인들은 200명가량 교육에 참여했다. 교육비는 10만원 내외. '신세 지고 사는 부분이 많으면 앞길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다만 시각장애인의 경우 교육비가 부담이 되는 이들에겐 대신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도록 한다. 이번 공연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에도 시각장애인 2명이 교육비 명목으로 목소리를 기부했다.

맨 왼쪽 사진은‘세종과 지화, 춤을 추다!’공연을 앞두고 열린 시각장애인 오디션 현장. 이도건(24·시각장애2급·사진)씨는 선발된 5명의 배우중 한명이다. 춤추는 헬렌켈러의 명상무 수련생들의 공연 연습 현장.
맨 왼쪽 사진은‘세종과 지화, 춤을 추다!’공연을 앞두고 열린 시각장애인 오디션 현장. 이도건(24·시각장애2급·사진)씨는 선발된 5명의 배우중 한명이다. 춤추는 헬 렌켈러의 명상무 수련생들의 공연 연습 현장. / 춤추는 헬렌켈러 제공
오는 25일 북촌창우극장에서 열리는 '세종과 지화, 춤을 추다!' 공연은 독특하다. 이 프로그램은 세종대왕의 장애인 복지정책을 주제로 만든 창작 공연으로 관련 내용을 담은 영상 다큐멘터리와 시각장애인들의 춤, 역사 전문가의 강연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는 방식이다. 일명 '히스토리텔링(history-telling) 콘서트'다. 지난달에는 시각장애인 댄서 공개 오디션도 열었다. 배우로 발탁된 유창호씨는 "악기를 다루는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은 많은데 댄서는 거의 없다"면서 "시각장애인의 직업군이 새롭게 탄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씨는 일주일에 세 번 천안에서 서울까지 왕복 6시간을 걸려 이동해야 하지만, 지금껏 연습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최희정씨도 "시각장애인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내면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 좋았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인 고(故) 강영우 박사가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고 했습니다. 전 세계 시각장애인이 3억4000만명이라고 해요. 그중 1%, 아니 0.1%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300만명의 시각장애인들이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이 세상엔 수필가, 소설가, 철학가, 비평가 등 시각장애인의 강점을 드러낼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찬후 대표는 "명상무를 배우면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키워진다"면서 "이번 공연을 통해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한계가 깨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공연 문의 070-4046-8854, 전석 1만5000원, 입장권 판매금 전액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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