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그 작품 그 도시] 영화 '그녀(her)'―로스앤젤레스

조선일보
  • 백영옥·소설가
    입력 2014.06.14 03:02

    사람이 거의 없는 심야 극장에서 '그녀(her)'를 봤다. 사람들이 인공지능 시스템을 친구처럼 사귀고, 모든 것이 '음성 인식' 하나로 해결되는 미래가 배경인 영화였다.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손 편지 닷컴'의 대필 작가. 그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편지'로 사랑을 고백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고 있다. 테오도르의 퇴근길, 로스앤젤레스. 미래의 도시는 아름답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고 군더더기 없이 현대적이다.

    그는 우울한 음악을 듣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햄버거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게임 속 캐릭터와 대화하는 걸 더 편안하게 생각한다. 인간이 진화할수록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란 우리의 선입견 그대로, 그는 아주 많이 외로워 보이는 남자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함께 자랐던 아내와 이혼 직전이다. 그의 아내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며 으름장을 놓지만 별거 1년이 다 되도록 그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을 그렇게나 많이 써댔지만 정작 자기 사랑은 완성하지 못한 위기의 남자인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으로 가장 많이 쓰이게 될, 이 남자의 그토록 공허한 눈빛은 상실의 체험에서 온 것이 이제 분명해진다.

    영화 ‘그녀(Her)’의 주인공 테오도르가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는 평화롭게만 보인다.
    영화 ‘그녀(Her)’의 주인공 테오도르가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는 평화롭게만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아내와 별거 중인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사랑에 빠졌다가 또 실연당한다. /최순호 기자
    외로운 이 남자는, 어느 날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쇼핑(구입!)한다. 그는 그녀와 친구가 된다. 사만다는 몸이 없는 인공지능 운영체제로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가지고, 스스로 확장하고 진화하는 이 시스템은 그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그의 편지를 대신 읽고, 그에게 필요한 정보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한다. 한마디로 친구이며 애인, 비서이며, 엄마 같은 존재인 셈이다. 사만다는 그저 기계가 아니다. 그녀에겐 비범한 인간에게 있는 '진정한 성장에 대한 욕망'이 있다. 그런 그녀와 테오도르는 사랑에 빠진다.

    사실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시스템과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 설정 자체는 내겐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PC 통신 시대에 이미 많은 남녀가 육체 없이 오직 '텍스트'와 '목소리'만으로 서로의 세계에 접속된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문자로만 존재했던 여자를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만나 비로소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 영화 '접속'의 선체험은 이제 육체가 아예 없는 시스템과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조금 더 어려운 과제를 부여한다. 사만다는 '육체 없음'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 여자에게 접근해 그녀의 몸을 빌려 테오도르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이며 탐험이다. 그녀는 점점 더 현명해지고 있다. '앨런 와츠' 같은 철학자와 대화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가진 독창적인 로맨스의 한 풍경이 제시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 즉 한 명만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전혀 다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점점 더 용량이 늘어나서,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오직 '나만의 것'이길 원하고 바라는 인간의 사랑과 달리, 그녀는 8316명과 동시에 얘기 중이며, 그중 641명과 사랑에 빠졌다. 소유와 사랑을 분별하지 못해 파탄으로 치닫는 인간들의 배타적인 사랑과 별개인 사랑이다. 물론 641명 중 누가 여자이고 남자인지 알 수 없다. 사실 둘 모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의 오류를 수정해 업그레이드한 그녀는 이미 인간을 초월해 버린 존재니까 말이다. 그제야 우리는 이 영화의 말미에 사만다가 내뱉는 이 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인공지능이라 당신보다 빨라요. 그런데 당신이라는 책을 당신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읽다 보면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간이 생겨버려요. 그리고 거기 빠져서 길을 잃게 돼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라는 책 속에 머물 수가 없어요."

    이 영화는 살아 있는 여자와 관계 맺기에 계속 실패한 남자가 결국 시스템과 사랑에 빠진다는 꽤 불편한 영화로 읽힐 가능성도 있다. 관계 장애 남성들을 위한 판타지 영화로 오독될 가능성 말이다. 사만다 역할을 한 스칼렛 요한슨의 '뇌쇄적인 목소리'가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위한 장치가 아니냐는 혐의를 둔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 '그녀'는 내게 인간의 '외로움'이나 '공허함'에 대한 시같이 들렸다. 말하자면 미래의 신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외로움을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처럼 읽힌 거다. 누군가 내게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미래의 아이폰 광고' 한 편 같단 얘기를 했을 때, 나는 가만히 그의 의견을 수긍했다.

    영화가 끝난 후 시스템에 실연당한 남자 테오도르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심야 극장에서 나와 작업실로 돌아가다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들의 얼굴 중 하나가 실연당한 직후, 남자들이 비로소 (자기감정을 드러내며) 짓는 해파리처럼 투명한 멍한 얼굴이란 것.

    영화 '500일의 썸머' 주인공 톰도 그렇다. 영화 '그녀'의 테오도르처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톰 역시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정신없이 차였다. 직업이 카피라이터인 톰은 아름다운 문장을 쓴다는 점, 여성적이고 섬세하다는 점에서도 테오도르를 닮았다. 평소 '평행이론' 따위에 늘 시큰둥했던 나는 이날만은 테오도르와 톰 사이에서 평행이론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며 영화 '500일의 썸머'를 봤다.

    ●그녀―스파이크 존스 감독 작품.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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