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2008년 금융 위기의 허리케인이 닥치기 직전이었다. 울펀슨 전 세계은행 총재 집에서 금융계 거물들이 저녁을 함께했다. 서머스 전 재무부 장관, 버냉키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외에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 고문도 있었다. 울펀슨이 두 번 퀴즈를 냈다.

"이번 금융 위기는 역사 교과서의 한 장(章·chapter)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각주(脚注·footnote)에 불과할 것인가." 모두 교과서에 조그만 글씨로 몇 줄 소개되는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둘째 질문은 '미국이 일본처럼 10년 불황에 빠질 것인가, 대공황에 들어갈 것인가'였다. 모두가 대공황이 아니라 장기 불황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버냉키는 더 낙관적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실패나 1930년대 대공황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 이번 위기는 대공황도 아니고 일본 같은 장기 불황도 아닐 것이다." 위기가 금방 끝날 것으로 오판한 것이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돼 리먼이 도산했고 전 세계가 처음 보는 허리케인에 휘말려들었다.

위기 때 지도자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 '현실 부정(否定)'이다. 위기를 위기로 인정하지 않는 병에 걸리는 것이다. 총수가 "그럴 리가 있나" 하며 경쟁 업체의 등장을 부인하면 회사는 머지않아 무너진다. 민심의 변화를 부정하다가 정권을 잃는 권력자도 매년 몇 명씩 등장한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빠져 있는 함정이 현실 부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은 국가 개조를 내걸었고 공무원 개혁, 해경 해체라는 극단 처방도 내놓았다. 위기의식이 머릿속에 가득하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했다.

문제는 그 현실 진단이 정확한 것이냐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병든 곳을 꼭 집어 알고 있는지, 국민이 아프다고 하는 맥을 제대로 짚고 있는지 의문이다. 혹시 합동분향소의 조문객 인파를 보며 온 국민이 반정부 행렬에 동참한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노란 리본이 늘어날 때마다 온 나라가 큰 병을 앓고 있는 듯 오판한 것은 아닐까. 위기의식의 과소(過小)도 지도자의 실패를 불러오지만 위기의식의 과잉(過剩)도 실패를 불러오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경제는 2011년 이후 3년 넘게 침체기를 겪고 있다. 소비도 반 토막이다. 불황의 파장은 빈곤층을 넘어 중산층으로 확산되고 있다. 오랜 불황에서 쌓인 불안 증상, 거기서 싹트는 불만과 분노가 한계점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경기는 풀리지 않으니 불만은 점점 더 팽창할 수밖에 없다.

경제에 대한 불안과 불만은 여객선 침몰, 지하철 사고, 대형 화재로 만들어진 불안·불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위험에 대한 걱정은 정책 변경을 통해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 불황에서 싹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국민의 위기감은 좀처럼 치유하기 힘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래 역대 정권이 저성장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박근혜 정부는 바로 여기서 다시 진맥을 해봐야 한다. 연쇄적 안전사고로 빚어진 재난성 위기와, 장기 불황 때문에 우리 사회에 넓고 깊게 깔린 경제적 위기부터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경기 침체에 재난까지 얹히는 바람에 분노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재난 대책만으로 위기 국면이 끝날 것이라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 인텔은 1980년대 중반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공세로 위기에 빠졌다. 인텔의 창업자 앤디 글로브와 고든 무어가 어느 날 지옥 같은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집무실에서 만났다. 글로브가 먼저 물었다. "만약 새로운 CEO를 영입하면 그 사람은 무슨 일부터 할까." 무어 회장은 곧바로 "메모리 사업을 없애겠지"라고 했다.

창업자들은 그렇게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폐쇄했다. 그들은 과거 해오던 사업의 연장 선상에서 회사를 살려낼 궁리를 하지 않았다. 종전 제품보다 몇 배 강력해진 고성능 반도체(CPU) 개발에 몰두해 오늘의 인텔로 재탄생했다.

회사에 비유하자면 박 대통령의 정치는 이제 적자(赤字) 경영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적자를 흑자로 바꿔줄 총리 영입에 실패했다. 위기를 서둘러 뛰어넘겠다는 욕심만 강했을 뿐 과거와 결별하고 다른 해법을 내놓을 경영인을 찾지도 않았다.

버냉키는 처음엔 오판을 했지만 올해 퇴임할 때는 박수를 받았다. 자신이 오판했음을 곧 깨닫고 파격적인 금융 완화라는, 과거에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위기 대책을 내놓으면서 경제를 최악에서 구해낸 덕분이다. 그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예외적 위기에 예외적 공략법을 시도했다.

박근혜 정부가 '적자 정치'에서 탈출하는 데 필요한 것도 이런 발상이다. 낯익은 얼굴을 등용하고 그동안 써먹던 정책을 조금 강화하는 식으로는 이번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과거의 포로가 되지 말고 인텔이나 버냉키처럼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경기 회복만큼 좋은 약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