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삶을 쓰려거든, '펜'으로 쓰세요

    입력 : 2014.05.30 03:00

    [필기구 회사 '라미' CEO 베른하르트 뢰스너]

    독일에서 출발한 필기도구 회사… 매년 6만 자루 판매·833억 매출
    "불필요한 기능·디자인 걷어내고 펜에 현대인 심리까지 담아내"

    "쓰면 느려지고, 느리면 분명해진다. 손으로 쓰면서 우린 그렇게 알게 된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 이 남자는 한 자루의 펜을 두고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1930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출발한 필기구 회사 라미(LAMY)의 CEO 베른하르트 뢰스너(R�sner) 얘기다.

    라미는 세계 최고의 필기구 회사 중 하나로 꼽힌다. 해마다 6만 자루가 넘는 필기도구를 생산·판매하고, 매년 833억원의 매출을 기록한다. 태플릿PC와 스마트폰,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도 라미 펜은 꾸준히 팔려나간다. 29일 서울 강남구 한 백화점에서 만난 뢰스너 회장은 "그건 이게 그저 단순한 펜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향과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라미 CEO 베른하르트 뢰스너 사진
    29일 서울 강남 한 백화점에서 만난 라미 CEO 베른하르트 뢰스너는 “우리의 펜은 단단한 건축물과도 같다”고 했다. “필요하지 않은 기능, 군살처럼 붙어 있는 디자인은 모두 걷어낸다. 뼈대만 남긴다. 본질이면 충분하다.” /라미 제공

    "필기구라기보단 패션에 가깝다. 얼마나 책을 읽는지, 얼마나 자주 메모하는지, 어떤 펜을 쓰는지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대충 알 수 있지 않은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만 봐도 그 사람이 보이듯. 우리 펜을 쓰는 사람은 대개 남들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보는 사람이다." 뢰스너 회장은 '라미 2000' 펜을 손에 들고 몸체를 비틀어 보였다. "이렇게 돌리면 끝 부분이 열리지만 눈으로만 봐선 짐작할 수 없다. 손으로 매끈하게 마감해서 그렇다. 첨단 기술에 아날로그 감성을 녹인 것이다."

    라미 디자인은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 학파의 철학에서 시작됐다. 바우하우스 학파는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라는 명제를 설파해 전 세계 수많은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영향을 끼쳤다. 뢰스너는 "이들의 철학은 독일 디자인 철학의 근간을 이뤘고, 우리 라미 펜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고 했다.

    창립자 조셉 라미는 1952년 잉크 만년필 '라미27'을 개발했고, 1966년엔 독일 유명 디자이너 게르트 뮐러(M�ller)와 손을 잡고 유선형의 만년필 '라미2000'을 내놨다. 물고기처럼 매끈한 몸체, 손에 착 감겨오는 무게감, 끊김 없고 부드러운 잉크의 흐름. 시장은 금세 반응했다. 뢰스너 회장은 "라미2000의 성공 덕에 작은 회사였던 라미가 크게 도약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엔 장식적인 펜이 대부분이었다. 라미 펜은 놀랍도록 간결했다. 그 새로움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라미는 이후 매년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협업, 신상품을 계속해 내놓았다. 덴마크 건축가 크누드 홀셔(Holsher), 전설적인 독일 디자이너 리처드 사퍼(Sapper)가 대표적이다. 뢰스너 회장은 "글을 손으로 오래 쓸 때 느끼는 물리적 고통부터, 글을 쓰고 싶은 현대인의 심리까지 세심하게 연구하고 이를 디자인에 적용한다"고 했다."

    뢰스너 회장에겐 스마트폰이 없다. 컴퓨터, 태블릿PC, 심지어 이메일 계정도 안 쓴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일을 하느냐"고 묻자 뢰스너 회장은 싱긋 웃었다.

    "메모하고, 말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오히려 쓸데없는 이메일을 읽고 지우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좋은 사람들과 더 많이 대화한다. 손으로 쓰면, 이렇게 말 그대로 삶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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