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도곡역 지하철 객차 화재는 자칫 '제2의 대구 지하철 참사'가 될 뻔한 아찔한 사고였다. 운행 중인 지하철 안에서 70대 방화범이 11L나 되는 시너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 계획적인 방화였다. 하지만 객차 안 승객들의 기민한 대응, 승객들의 신고를 받은 기관사의 침착한 대처로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

불은 이날 오전 10시 51분쯤 3호선 매봉역을 출발해 도곡역으로 향하던 지하철 네 번째 객차 안에서 일어났다. 객차 맨 앞쪽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조모(71)씨가 여행용 배낭 2개를 열었다. 안에는 1L짜리 용기에 담긴 시너 11병이 들어 있었다. 조씨는 다섯 병의 뚜껑을 연 뒤 발로 가방을 넘어뜨렸고, 바닥으로 흘러나온 시너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펑'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고 승객 40여명은 비명을 질렀다.

도곡역 지하철 방화 사건 정리 그래픽

가장 먼저 소화기를 들고 나선 이가 권순중(46)씨였다. 매봉역 역무원인 그는 업무차 도곡역으로 가던 길이었다. 권씨는 방화범 조씨와 같은 객차에 타고 있었다. 권씨는 "4-2 문 앞에 서 있는데 '불이야' 소리를 듣고 옆을 바라보니 배낭 두 개가 불타고 있었다"고 말했다. 119 신고를 하려던 그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권씨는 "119 신고 좀 해주세요! 비상벨 눌러서 기관사하고 통화하세요! 소화기 좀 갖다주세요!"라고 외쳤다.

승객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마스크를 쓴 한 여성은 주변의 소화기 5~6개를 권씨에게 차례로 건넸다. 한 승객은 비상벨을 눌러 기관사에게 "열차 안에 불이 났다"고 알렸다. 다른 여성 승객은 사고 발생 3분 만인 오전 10시 54분쯤 112 신고센터로 전화를 해 "누가 열차 안에 불을 질렀다. 도곡역 도착 직전"이라고 신고했다.

시너병 든 배낭… 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도곡역 지하철 방화 사건이 일어난 객차 안에서 발견된 방화범 조씨의 시너병이 든 배낭과 부탄가스통.

권씨는 불붙은 배낭을 향해 소화기를 분사했다. 조씨가 권씨에게 달려들어 몸으로 막은 뒤 2차, 3차 불을 질렀다. 이때마다 권씨는 화염을 향해 소화액을 쏘았다.

비상벨 신고를 통해 화재 사실을 알게 된 기관사 함기선(58)씨는 즉시 지하철을 세웠다. 객차 5번째 칸까지는 도곡역 승강장에 닿았지만, 6~10번째 칸은 미처 승강장에 닿지 못했다. 함씨는 "운전실 문을 열어 앞쪽 승객들을 밖으로 대피시킨 뒤 소화기를 들고 방화 지점으로 뛰어갔다"고 말했다.

지하철 맨 끝에 있던 차장 신갑수(49)씨는 관제소와 교신해 양방향 지하철 운행을 중단시켰다. 그는 "당황하지 말고 불난 곳 옆칸으로 대피하라" "도곡역 진입이 어려운 분은 선로 쪽 문을 열고 매봉역 쪽으로 이동하라"고 방송했다.

연기로 가득 찬 도곡역… 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도곡역 지하철 방화 사고로 발생한 연기가 도곡역 선로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사고 여파로 지하철 3호선 양방향 운행이 한때 중단됐다.

승강장에 멈춘 앞쪽 객차 승객 270여명은 도곡역을 통해, 뒤쪽 객차에 있던 승객 100여명은 선로를 따라 매봉역까지 걸어간 뒤 탈출했다. 당시 대피했던 한 승객은 "안내 방송이 나왔다"고 말했다. "기다리라"는 방송이 되풀이됐던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와 달랐다.

지하철이 정차한 도곡역 역무원들은 승강장 내 소화전 2곳을 이용해 진화에 나섰다. 권씨와 승객들, 기관사·차장, 도곡역 역무원 모두가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불은 9분 만인 오전 11시쯤 진화됐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대피하던 승객 서모(62)씨가 발목을 다쳤고, 방화 지점 양옆의 노약자석 의자 6개가 불에 탄 것이 전부였다.

방화범 조씨는 불을 낸 뒤 객차를 빠져나와 병원에 후송됐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그가 가방에 시너와 부탄가스, 칼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고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