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한 지난 5월 11일 삼성그룹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2주간 일정으로 5월 1일 미국 출장에 나섰던 이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급거 귀국해 병원으로 향했다. 이 회장 입원 직후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 등 삼성 수뇌부는 삼성서울병원에 집결해 이 회장의 상태를 점검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휴일임에도 주요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 대부분이 출근해 비상대기했다.
하지만 이튿날인 5월 12일 삼성그룹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룹 수뇌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전 6시30분 서울 서초사옥으로 출근했다. 미래전략실은 매주 월요일에 하는 팀별 주간 회의를 열었고, 계열사 최고경영진도 평소 일정을 그대로 소화했다. 14일에는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사장단 회의도 예정대로 진행했다.
외신들은 스티브 잡스 혼자 회사를 이끌다시피한 애플과 삼성은 다르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룹 총수가 건강악화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휘되는 삼성의 힘은 평소에 잘 짜여진 ‘시스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스템’을 구축하고 움직여온 이 회장이 입원함으로써 삼성의 시스템이 앞으로도 잘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이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도 있지만 이미 고령(高齡)에 접어든 이 회장이 수년 전부터 건강이상설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심장 시술까지 받자 ‘포스트(post) 이건희’ 시대 삼성의 미래와 리스크 관리가 국내외에서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 회장의 회복이 지연되면서 이 회장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1968년생인 이 부회장은 2001년 상무보로 승진하면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에서 전무와 부사장, 사장을 거쳐 2012년 부회장에 올랐다. 그는 이 회장 옆에서 그룹 및 주요 계열사 인사에 관여하는 등 실무적인 부분을 챙겨 왔고 해외 비즈니스 거래선 및 정재계 인사들과의 만남에 주력하며 글로벌 경영에 속도를 붙였다.
이 부회장의 최근 행보를 보면 그는 삼성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최대 통신사인 버라이즌의 로웰 매커덤 회장의 초대를 받아 미국에 다녀왔으며 2월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왕양(汪洋) 부총리를 만났다. 4월에는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한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조찬모임에 참석했다. 4월 중국에서 열린 보아오포럼에서는 IT와 모바일 기술을 활용한 의료·헬스케어 사업을 신성장동력으로 키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5월 1일 미국 출장도 갤럭시S5 판매 등을 점검하고 시스코·버라이즌 등 해외 파트너들과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부회장은 삼성의 국제적인 얼굴로, 애플과 같은 기업들과의 거래를 중재해 왔다”며 이 부회장을 국제적 인맥과 감각을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이 부회장은 후계자로서 삼성그룹 내 입지도 탄탄하다. 삼성은 큰 틀에서의 경영권 승계 작업은 이미 이 부회장 중심 체제로 마무리한 상황이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크게 그룹 지주사 격인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을, 삼성생명은 그룹 간판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각각 지배하는 형태이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최정점에 있는 에버랜드의 최대주주는 이 부회장으로 25.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부회장의 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은 각각 8.37%를 갖고 있고, 이 회장의 삼성에버랜드 보유 주식은 3.72%에 불과하다.
삼성그룹이 지난해부터 진행하고 있는 계열사 간 사업 조정도 경영권 승계와 관련이 있다는 관측이 많다. 삼성은 지난 3월 말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 계획을 발표했다. 이로써 전자(電子)·자동차 소재(素材)와 에너지 사업을 아우르는 자산 15조원 규모의 삼성그룹 5대 계열사가 탄생하게 됐다. 업계에서는 두 회사의 합병으로 인해 이 부회장을 중심으로 전자 계열사들의 수직계열화가 일단락됐다고 평가한다.
지난 4월 2일에는 삼성종합화학이 삼성석유화학을 흡수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삼성석유화학 지분 33.19%를 보유한 이부진 사장은 합병 후 삼성종합화학 지분을 4.91% 갖게 돼 화학 계열사에 대한 지분율이 크게 떨어진다. 이 때문에 전자 계열사에 이어 화학 계열사도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재편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삼성그룹의 알짜 계열사인 삼성SDS는 5월 8일 연내 상장 방침을 밝혔다. 삼성SDS가 상장될 경우 현재 장외시장 가격으로만 따져도 11.25%의 지분을 갖고 있는 이 부회장은 약 2조원의 현금을 쥐게 된다. 이 자금은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의 소유 지분을 상속받을 경우 내야 하는 상속세를 내는 데 쓰이거나 관련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는 데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재계는 “주력회사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이재용 부회장이 관할하고 있는 데다 이미 대부분의 그룹 업무를 이 부회장이 챙기고 있기 때문에 삼성 지배구조에서 혼란이나 큰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회장의 입원을 계기로 이 부회장의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 부회장의 경영 능력에 물음표가 붙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인터넷판은 지난 5월 12일(현지시각) “이 회장처럼 삼성을 이끌 인물이 있느냐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며 “이재용 부회장이 수년간 경영수업을 거쳤지만 그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도했다.
포브스는 이 회장을 ‘삼성의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자)로 표현하고 스마트폰 시장 둔화 등으로 삼성이 중대한 갈림길에 선 시기에 이 회장의 건강 문제가 불거졌다고 전했다. 포브스는 “삼성은 이 회장의 건강악화 의미를 축소하려 하지만 후계자 문제와 업황 악화 등을 고려할 때 삼성에 대한 ‘심판의 날(a day of reckoning)’이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투자자들이 경영 승계 문제가 삼성의 장래를 둘러싼 불확실성을 키우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부회장이 최고경영자로서 경험이 부족할 뿐더러 아버지인 이 회장만큼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와 관련, 삼성 내부에서는 이 부회장에 대해 ‘남의 말을 존중하고 귀기울여 듣는 공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이 나온다. 삼성의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회의 때 자신의 뜻과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일단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난 뒤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부드러운 면모를 갖춘 게 사실이지만 한번 결정한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감성을 겸비하고 있다”며 “카리스마를 앞세운 이 회장과 다른 ‘스마트 리더십’을 이 부회장이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