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79) 전 총리는 7일 본지 인터뷰에서 "세월호 사고 수습 과정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전혀 보이지를 않더라"며 "야당도 '대통령이 사과하라'고 하는데 솔직히 이 정도 얘기밖에 못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 전 총리는 "이번 사고는 정치권도 책임이 있고, 사고 수습과 대책을 세우는 데 있어서 국회와 여당의 역할이 크다"며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있기 때문에 여당이 주도적으로 대책을 세우기가 힘든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여당이 앞장서서 뛰기를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국회에서 사고 해결책을 논의하고 근본적인 국가 개혁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라며 "이 문제에서는 여야가 당리당략을 떠나 공조하고 협력해야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시 8회로 판사 생활을 시작한 이 전 총리는 대법관을 거쳐 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 감사원장을 지냈다. 1993년 국무총리로 발탁돼 '대쪽 총리'로 명성을 얻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으로 물러났다. 그는 1997년과 2002년, 2007년 대선에 세 차례 도전했으나 실패했으며 2012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도운 뒤 사실상 정계를 떠났다.
―세월호 사고를 바라보는 심정은.
"감사원장과 총리, 정당 대표, 국회의원을 하면서 대체 내가 기여한 게 무엇이었나,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다는 걸 보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말 그대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공직자나 정치가, 책임 있는 사회 지도층 모두가 이번 참사에 죄인이 된 마음일 것이다.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미래 희망은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나섰다."
―정부의 사고 대응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박 대통령이 처음 현장에 간 것이 아주 중요한 기회인데, 아쉬운 점이 많다. 사전에 상황을 숙지하고 현장에 관계 장관을 모아 대책 기구나 팀을 구성하고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대통령도 처음 당하는 일이라 당황했을 테지만 좀 더 숙고했어야 했다. 앞으로 박 대통령은 결기와 강단을 갖고 오랜 적폐와 부조리를 없애는 데 성과를 내야 한다. 그래야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좌절감이 줄어든다."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도 중요하지 않은가.
"나는 야당이 얼마든지 이번 사고를 희망의 메시지로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려면 대통령이 수시로 야당 대표를 불러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한다. 작년 박 대통령과 김한길 새정치연합 대표의 회동은 너무 아쉬웠다. 내가 야당 대표 때 김대중 대통령과 9차례 여야 영수회담을 했는데, 한두 번 의견 충돌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서로간에 큰 도움이 됐다. 대통령은 야당 대표에게 힘을 실어줬고, 국정 운영에서 야당의 도움을 받았다."
―정홍원 총리가 사퇴했는데….
"총리를 (대통령) 수행원 정도로 생각하는 게 문제다. 권한이 별로 없는 총리가 현장에서 물벼락을 맞았다. 국가가 희화화됐다는 느낌이 든다. 총리는 대통령이 역할과 권한을 주면 국가 운영을 주도하는 굉장히 중요한 자리지만 안 주면 하찮은 자리가 된다. 기능을 못 하는 총리는 무게만 나가는 젖은 옷이 되고, 기능과 역할을 하는 총리는 가볍고 상쾌한 옷이 된다. 이번 사고의 총체적 해결은 대통령보다 총리가 해야 한다고 본다."
―공직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할 부조리와 적폐는 무엇인가.
"관민(官民) 유착과 감독·피감독 기관의 유착, 적당주의와 비리 등으로 독버섯 같은 것들이다. 지난 60여년간 정권은 역동적으로 변했지만 국가 운영 틀과 공직사회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예산안은 매년 같은 방식으로 편성되는데, 구석구석에 부처 조직과 공무원들과 관련된 예산이 숨어 있다. 이런 부조리와 적폐들을 척결하는 것이 국가 개혁의 포인트다. 예전에 감사원장으로 일할 때 보면 외부 인사와는 점심 자리를 일절 갖지 않고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공무원들이 있었다. 이 같은 윤리 덕목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문화와 의식을 확산시켜야 한다."
―법과 원칙을 안 지킨 것이 이번 사고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맞다. 제도가 부족하고 매뉴얼이 제대로 안 돼 있어서라기보다는 이것을 안 지켰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다. 초등학생도 판단할 수 있는 일인데도 법치(法治)를 지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법치와 정의, 공동체 교육을 해야 한다. 성인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다. 세월호 선장도, 관련 공무원들도 이 같은 소양 교육을 거의 못 받은 것 아닌가.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윤리관과 기준을 도입해야 한다. 시스템과 제도를 아무리 마련해도 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선진사회의 조건이다."
―세월호 선사(船社)의 실질적 소유주인 유병언씨 일가에 대한 비판도 높다.
"유병언 일가의 기업은 시장에서부터 도태시켜야 한다. 이런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은 근본적 이유는 바로 관민 유착과 같은 사회적 부조리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개혁해서 시장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인터넷에서 각종 괴담이 난무하면서 사회적 혼란과 증오가 커지는데….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 심하게 얘기하면 인성(人性)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법으로 다스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정치권이 정쟁 목적으로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반드시 비판하고 시정해야 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 정치적 이익을 위해 나라를 망가뜨리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
―사회 지도층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나.
"지금 우리가 지나친 슬픔과 좌절감에 빠져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고, 미래가 없다'고만 하면 정말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어질 것이다. 이젠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빠지지 말고 사회적 적폐와 부조리를 뜯어고치고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사회 지도층이 자괴감 섞인 말로 미래의 싹을 밟으면 안 된다. 과거 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제3자처럼 정부를 비판하면서 '고쳐봐야 아무 소용없고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언행을 가려서 해야 한다."
―아직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뭔가.
"이번에 단원고 학생들은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서로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는 등 기성세대가 못 갖춘 배려와 희생의 정신을 보여줬다. 아직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기성세대가 아닌 어린 학생들이 보여준 것이다. 이들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2012년 대선 끝나고 어떻게 지냈나.
"정치적 활동은 전혀 안 했다. 가끔 여권 인사를 만나긴 했지만 박 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다. 앞으로도 정치 활동을 재개할 계획은 전혀 없다. 이미 무대를 떠난 지 오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