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필리핀이 5일 필리핀 북부에서 대규모 합동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미군 2500명, 필리핀군 3000명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다. 지난달 28일 미군의 필리핀 재(再)주둔을 허용하는 방위협력증진협정(EDCA)을 체결한 이후, 첫 연례 훈련이기도 하다. 델 로사리오 필리핀 외무장관은 이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영유권 분쟁에서 우리의 대응 역량이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군은 남중국해 팔라완섬에서 상륙 훈련을 한다. 중국과 필리핀이 영토 분쟁 중인 난사군도(南沙群島·스프래틀리 군도)와 가까운 곳이다. 수도 마닐라 인근 군사기지 5곳에서 해양 감시 훈련도 펼친다. AP통신은 "미군의 가장 오랜 아시아 동맹인 필리핀이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다"며 "중국과 다툼이 벌어지자 낙후된 군사력을 현대화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94년간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은 1992년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했다. 반미(反美) 감정 때문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미군기지 오염 문제, 미군 범죄 문제, 식민지 역사 등으로 인해 대규모 반미 집회가 벌어졌다. 미군은 필리핀 상원의 군사기지 조차(租借) 연장안 부결에 따라 1992년 철수했다.

자주 국방의 꿈과 현실은 달랐다. 1990년대 중반 군 현대화에 나섰지만, 불과 몇년 뒤 동아시아 경제 위기로 흐지부지됐다. 필리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지출은 2000년대 중반부터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지금도 5만8000㎞에 달하는 필리핀 해안선을 지키는 건 순찰정 34척이 전부다. 일간 필리핀스타는 "나라를 통틀어 전투기가 한 대도 없다"며 "공군(空軍)에 '공(空)'만 있고, '군(軍)'은 없는 셈"이라고 했다.

무능한 군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왔다. 중국이 2012년 남중국해 황옌다오(黃巖島)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자, 필리핀 현지 언론은 "과거 미군의 수빅 해군기지에서 고작 200㎞ 떨어진 곳이다. 예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국내 이슬람 반군의 테러가 격화되자 2002년부터는 미군으로부터 대(對)테러 훈련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태풍 하이옌 상륙 당시 무력했던 현지 군과 대조적으로 미군의 구조가 호평을 얻었다"며 "이 일로 반미 감정이 급격히 누그러져 EDCA를 체결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