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선임기자

35년 전 경상남도 고성의 한 젊은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답답하다"고 느꼈다. 석가모니가 생로병사를 목격한 후 방황했듯 그 역시 끝 모를 허무에 시달렸다. 그 의문을 풀어준 게 경허(鏡虛) 스님 행장이었다.

그는 '자유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강원도 월정사(月精寺)에서 머리 깎은 지 올해로 35년째다. 월정사에서 출가해 상원사(上院寺) 주지 3연임에 월정사 주지 3연임이란 기록을 세웠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

월정사는 강원도의 본사답게 비조(鼻祖)인 자장, 한암(漢岩), 탄허(呑虛) 같은 한국 불교의 큰 산맥을 배출했다. 문손(門孫)이 500여명이니 수행의 치열함을 알 수 있다. 주지 정념(正念) 스님은 월정사맥의 종손격이다.

절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전나무 숲길이 있다. 아침·점심·저녁 세 번 이 길을 돌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화중생련(火中生蓮), 연꽃은 불속에서 핍니다. 매일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웁니다. 무심(無心)!"

주지론 이례적으로 하안거·동안거를 거르지 않는 그에게 승가(僧家)의 CEO 같은 답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것은 화두(話頭)다. "팔만대장경을 한자로 요약하면 뭔 줄 아세요? 심(心)입니다. 중생은 병을 앓고 있어요."

"우울증·스트레스·공황증이 그것이죠. 자기 아닌 남을 보는 왜곡된 세계관 때문인데 바른 이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비우는 겁니다. 공(空)! 바로 반야의 지혜요, 중도적 겸허입니다."

어디 병리가 개인뿐인가, 나라도 남북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옳고 상대는 그르단 생각은 안 됩니다. 상대가 그르면 나도 잘못이죠. 개시개비(皆是皆非), 이게 개인과 지역 갈등·동북아 갈등을 풀 화쟁(和諍) 정신이죠."

월정사에는 전설이 많다. 자장율사가 중국 땅에서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는 깨우침을 받았다는 것부터 한반도에서 가장 신령한 곳이 지금 자리이며 심지어 여기서 보는 달이 천하에서 가장 곱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인지 6·25 때 인민군에 맞서 부처님 적멸보궁부터 상원사를 지켜낸 한암의 '기적'이며 자칭 '국보' 고(故) 양주동이 탄복했다는 탄허의 자취가 남아있다. 아마 그것은 정념 스님에게 자랑이자 부담이 될 것이다.

‘법당 백 채보다 제대로 수양한 스님 한 명이 훨씬 낫다’고 탄허는 일갈했다. 매일 그 말씀을 새긴다는 정념 스님과 문손들은 지금도 숲길에서 능소능대(能小能大)한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려 용맹정진하고 있을 것이다.

"온갖 불보(佛寶)에 삼국유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신라 호국불교의 기원도량이자 부처님과 인연 있는 불국토(佛國土)에 불사는 일부분일 것이고요, 제가 보일 수 있는 리더십이라면 불교의 변화가 아닐까 합니다."

정념 스님에 따르면, 농촌과 산중(山中)을 기반으로 한 불교는 도시 중심 사회가 되면서 유리됐다. "그렇다면 어떤 역할을 해야겠지요. 유리한 건 있어요. 맑은 공기와 숲과 물이 있는 곳, 사찰이 힐링의 중심입니다."

중생 치유를 위해 만든 게 한 달간 행자 생활을 하는 단기 출가학교다. 유명인부터 소시민까지 2000여 도반(道伴)이 배출됐다. 매년 5월 2000여명이 상원사까지 가는 걷기대회도 도시가 준 상처를 치료하려는 배려다.

7대 종교를 아우르는 종교평화협의회도 그가 만들었다. "종교 간 벽을 허물자"는 취지다. 청소년을 위해 각급 학교에 인성교육을 지원하며 콘크리트로 덮인 전나무 숲길을 살려 매년 150만명이 찾게 한 것도 그다.

"솔바람 날리고 푸름에 비우고 심성을 채우자는 거지요. 전 우리 불교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봐요. 무엇보다 민족과 정체성이 같잖아요. 그래서 종단 운영도 민주성, 대중성, 투명성을 더 강화해야 합니다."

'꽃미남' 같은 정념 스님은 선답을 어디서 얻었을까? "전나무 숲길을 돌며 항상 생각합니다.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용맹심의 발현이긴 하지만 몸 상할 수 있죠. 몸 상해 깨달을 수 있나요?"

스님은 대화가 끝나자 적광전(寂光殿)으로 향했다. 탄허가 남긴 현판 글씨는 '번뇌가 고요해져 가없는 광명이 비치는 비로자나불의 경지'를 말하고 있었다. 스님은 거기서 항상 인재불사론(人材佛事論)을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