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朴正熙와 46년 전에 만나 “한국 10大 강대국 된다”고 했던 美미래학자, 그는...

입력 2014.03.22 11:41 | 수정 2014.03.22 11:52

1973년 11월 13일 박정희 대통령과 허먼 칸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1973년 11월 13일 박정희 대통령과 허먼 칸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 여전히 들리는 건 그의 통화대기음(컬러링)뿐이다. 영남대 최외출(崔外出) 부총장 얘기다. 최 부총장의 통화대기음은 새마을운동의 주제가인 <새마을노래>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기획조정특보를 맡았던 최 부총장은 대선 직후부터 2014년 3월 중순 현재까지 언론에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림자 실세’ 최외출, 4월에 책 출간

《월간조선》은 칩거기간 중 최 부총장이 쓴 책의 원고를 출간 전 입수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학 교수, 허먼 칸(가제)>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될 이 책은 4월 중 출간 예정이다. 책의 저자는 세 명이다. 최 부총장과 박영숙(朴英淑) 유엔미래포럼 대표, 《영남일보》 이영란 기자다. 책의 추천사는 허먼 칸의 제자였던 제롬 글렌(Glenn) 밀레니엄프로젝트 회장이 썼다.

책은 크게 6장에 걸쳐 박정희 전 대통령과 미래학자 허먼 칸 박사의 인연, 허먼 칸 박사가 한국의 발전에 미친 영향, 2014년 이후 국가리더십이 가야할 방향 등을 기술했다. 책을 발간할 4월은 마침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지 44주년이 되는 달이다. 칸 박사는 새마을운동의 태동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박 전 대통령과 허먼 칸의 관계를 살펴보자.

허먼 칸은 어떤 사람인가. 1922년 2월 15일, 유럽에서 넘어온 유대인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한 후 캘리포니아공대(Caltech)에서 석사를 마쳤다. 경제 사정상 박사 과정은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미국 최초의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Land Corporation)에서 근무했다. 허먼 칸의 아이큐는 매우 높았다. 학창 시절은 물론 그 이후까지 ‘천재’라는 별칭이 그를 쫓아다녔다.

랜드연구소 근무 당시, 허먼 칸은 에드워드 텔러(Teller), 한스 베테(Bethe) 등과 함께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시나리오기법이라는 미래예측 기법도 개발했는데, 이 방법으로 허먼 칸은 핵전쟁 가능성을 예측해 핵전쟁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Kubrick)이 이때의 허먼 칸을 모델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 1964>를 만든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61년 랜드연구소를 나온 허먼 칸은 허드슨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는 미국 국방정책에 조언을 하는 동시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국의 정부 기관, 민간 기관 컨설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열핵전쟁론》(1962)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1962) 《에스컬레이션》(1968) 《세계는 이렇게 변하고 있다》(1972) 등 핵전략, 안전보장, 사회변동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의 저서 중 《세계경제발전, 1979년과 그 이후(World economic development 1979 and beyond)》는 한국에서 《대전환기》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 번역한 이는 김윤환(金潤煥) 전 신한국당 대표였다.

대통령과 미래학자의 만남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하는 미래학자 허먼 칸이, 당시만 해도 낙후된 분단국이었던 한국의 지도자 박정희를 만난 계기는 무엇일까.

기존에는 김성진(金聖鎭) 전 문화공보부장관이 허먼 칸을 박 전 대통령에 소개한 걸로 알려져 있다. 《월간조선》 2009년 11월호에 실린 김 전 장관의 인터뷰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인터뷰는 김 전 장관이 암으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인터뷰였다. 관련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만년에 전통문화 복원과 관련, 김성진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김성진 전 장관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계속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려면 유구한 문화전통을 가진 나라란 것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세요. 궁리 끝에 미래학자 허먼 칸 박사를 박 대통령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는 전국을 조사했고, 그 결과 ‘전통문화가 밀집돼 있는 곳은 경주이고, 경주 일대를 종합개발하는 게 첩경’이라고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지요.” 박 대통령은 허먼 칸 박사에게 현대건설이 유조선을 처음 만들어 시험항해하는 항공사진을 보여주며, “이 유조선을 우리가 만든 것이다”라고 하자, 허먼 칸은 “바로 이거다, 유조선의 시험항해를 경주 일대에서 한다면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와 첨단 기술력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책에는 김 전 장관의 주장과 달리 두 사람의 인연이 더 일찍부터 시작됐다는 주장이 실려 있다. 칸 박사와 함께 근무했던 준 이소무라(Isomura) 허드슨연구소 수석연구원의 증언에 바탕한 주장이다. 내용은 이렇다.

1966년에서 1968년까지 칸 박사는 미국에 군사전략 자문을 맡고 있었다. 핵전쟁 반대운동을 하던 칸은 핵폭탄 피폭에 관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일본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와카이즈미 게이(若泉敬) 교토산업대 교수가 세운 세계외교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와카이즈미 교수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내각의 외교자문에 응하면서 일본 총리의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허먼 칸과 와카이즈미 교수는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핵전쟁 저지 방법과 함께 베트남전쟁 전략을 연구하던 허먼 칸은, 베트남전쟁을 들여다보면서 한국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다.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 6개월간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는데, 파병 연인원은 총 31만 3000여 명에 달했다.

“한국은 반드시 10大 강대국 된다”

1968년 일본을 방문한 허먼 칸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와카이즈미 교수에게 전했고, 와카이즈미 교수는 그와 함께 한국을 찾아 박 전 대통령을 비밀리에 만나게 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와카이즈미 교수가 사토 내각의 외교안보자문관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허먼 칸과 박 대통령이 비밀리에 만난 이유는 당시 국내에서 일었던 베트남전 파병 반대 의견을 의식해서였다고 한다. 베트남전 전략을 연구하는 미국의 학자가 베트남에 많은 군인을 보낸 나라인 한국의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을 터다.

허먼 칸의 다른 지인들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우주공학자 테드 고든 박사와 유엔미래포럼의 회장이자 밀레니엄프로젝트의 회장인 제롬 글렌 박사는 “허먼 칸이 60년대부터 이미 한국을 자주 왕래했다”며 “처음 방문했을 때는 한국이 가난하고 발전하려면 멀었다고 했지만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이 10대 강대국이 될 것이라 확신을 갖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고 한다.

이들의 증언이 사실일까. 기자는 예전 신문 보도를 살펴봤다.

1973년 8월 10일 조흥은행 강당에서 열렸던 허먼 칸 박사의 강연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
1973년 8월 10일 조흥은행 강당에서 열렸던 허먼 칸 박사의 강연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
1968년부터 허먼 칸은 갑자기 한국 신문에 단골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논문이나 발언을 인용하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1968년 3월 14일 자 《경향신문》은 ‘미국의 핵전략 전문가 허먼 칸 씨가 멀지 않아 월남을 방문한다’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제롬 글렌 회장은 허먼 칸이 베트남 방문 길에 한국을 방문했다고 증언했다.

1970년부터는 거의 매해 허먼 칸의 방한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허먼 칸은 1970년 8월에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서울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 참여했고, 1972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박 전 대통령이 허먼 칸을 접견했다는 기사도 자주 나왔다. 1973년 11월 13일 자 《경향신문》의 기사다.

<박정희 대통령은 13일 상호 방한 중인 허먼 칸 미 허드슨연구소 소장의 예방을 받고 환담했다. 허먼 칸 박사는 이 자리에서 “한국 정부가 박 대통령이 갖고 있는 개발에 대한 가치관을 기초로 한국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일반 국민들에게 개발의 가치관과 이념에 대해 인식을 더욱 북돋워 주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환담 내용은 이들의 만남이 처음이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허먼 칸, 새마을운동 조언

신문 보도를 고려해 보면 김성진 전 장관의 주장처럼 박 전 대통령과 허먼 칸의 첫 만남이 1970년대 후반에 이뤄졌다기보다는 1960년대 후반이나 적어도 1970년대 초반에 있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한 듯하다.

허먼 칸은 어떤 식으로 박정희 정부를 도왔을까. 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난 지금, 살아 있는 이의 증언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이가 허먼 칸의 제자였던 제롬 글렌 박사다. 그의 증언을 인용하면 이렇다.

“허먼 칸은 한국 방문에 앞서 내게 많은 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나도 젊은 시절에 그런 내용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도 잘 모르면서 여러 가지 자료를 정리해 줬다. 미래에 부상할 산업과 기술 발전에 대한 예측이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한국의 지리적 조건이나 사회 현상,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전략을 짠 것은 흥미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미래기술 예측에 가장 관심을 가진 박 전 대통령은 앞으로 어떤 기술, 어떤 산업이 세계적으로 부상하는지, 언제 부상하는지, 세계시장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한국이 잘살기 위해서는 정부가 어디에 투자하고 어떤 정책으로 어떻게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지 등을 정밀하게 허먼 칸에게 묻곤 했다고 한다.”

칸 박사와 박 전 대통령, 두 사람의 협력 관계가 잘 드러난 예로 어떤 사업이 있을까. 바로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들 수 있다.

1970년 11월 13일 젊은 노동자 전태일이 청계천변에서 분신 자살을 했다. 글렌 회장의 전언에 따르면 분신 사건 직후 허먼 칸을 만난 박 전 대통령은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박 전 대통령에게 허먼 칸은 “앞으로 도시노동자운동이 더욱 격렬하게 벌어질 것”이라며 “농촌에 있는 인력을 훈련시켜서 도시노동자로 유입시키되, 이런 일을 녹색운동과 정신개혁운동과 함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막 시작한 새마을운동에 방향을 제시하는 듯한 조언이다.

1973년 7월 24일 자 《매일경제신문》은 ‘한국을 방문한 허먼 칸 박사가 김현옥(金玄玉) 당시 내무부장관을 만나 약 1시간 동안 새마을운동 현황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브리핑을 들은 허먼 칸은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농촌주민의 일대정신 개혁운동”이라며 “한국은 멀지 않은 장래에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해소하여 농촌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허먼 칸의 저서 중 《세계경제발전, 1979년과 그 이후》란 책이 있다. 앞서 설명했듯 《대전환기》라는 제목으로 김윤환 전 신한국당 대표가 번역한 책이다. 허먼 칸은 1970년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책에는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다. 글렌 박사는 그 부분에 대해 “허먼 칸 박사가 박 전 대통령과 나눈 대화를 책에 담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개발과 환경 발전의 병행 강조한 허먼 칸

책 속에서 허먼 칸은 “한국 정부가 도로, 철도, 항만, 통신시설 등 인프라 확충에 힘쓴 것은 미래적인 시각이었다고 칭찬하며,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 국영 금융기관이 나서고, 화폐가치를 절하하는 등 그야말로 힘이 센 한국이 되도록 꾸준히 정책을 추진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또 “한국은 국민들의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 즉 허리띠를 졸라매는 국민통합이라는 훌륭한 문화가 있고,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단호하고 자유 신경제학자가 등장해 대통령을 지원하므로 박정희 정권은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 외에 ‘그린벨트’ 정책에서도 박 전 대통령과 허먼 칸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정식 명칭이 ‘개발제한구역’이지만 그린벨트로 통용되는 환경보전 정책은 박정희 정부의 최대 치적 중 하나다. 20세기 여러 나라의 국토계획 중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허먼 칸은 1970년대 당시 ‘그린 프로젝트’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 각국을 돌며 한 강연에서 지구촌이 개발과 함께 환경보호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강하게 역설했다. 개발과 환경보호의 조화다.

칸 박사는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개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환경운동의 논리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성장에 따른 지구멸망의 가능성은 환경보존으로 극복할 수 있다”며 “지구촌이 그린 프로젝트를 펼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특히 아시아 국가를 돌면서, 비료로 질산염을 과용하는 행태를 비판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그린벨트 정책이나 녹색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과학기술 인력 양성에서도 두 사람의 생각은 일치했다. 허먼 칸은 1961년 랜드연구소를 나와 허드슨연구소를 설립할 당시 ‘과학 인력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인재양성이 너무나 철학적이고 정치적이며 인문적인 부분에만 치중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미래사회 변화는 과학기술이 이끌어 나가는 데 미국은 준비가 안 돼 있다. 교육 변화를 이끌기 위해 허드슨연구소를 만든다”고 말했다고 한다.

후에 간행된 저서 《세계경제발전: 1979년과 그 이후》에도 같은 요지의 기술이 나온다. ‘미국은 과학기술교육 중시 쪽으로 선회했고, 아시아도 이제는 과학기술교육, 기술인재 양성 없이는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식이다.

한국 지도층에 희망 심어 주다

기자는 허먼 칸에 대해 알고 난 후 한국의 경제발전에 미친 영향을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책을 구상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한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 국민, 특히 사회 지도층에게 ‘우리도 발전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 준 것이다.

허먼 칸은 70년대 내내 수없이 한국을 방문하며 강연을 하고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그는 시종일관 “한국은 반드시 발전하며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다”고 주장했다. 허황한 소리로 들렸을 수도 있지만, 세계적인 미래학자의 예측이니 그의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희망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1972년 8월 전경련과 《동아일보》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허먼 칸의 강연 내용을 보자. 《동아일보》 1972년 8월 10일 자 내용이다.

<허드슨연구소의 연구 활동 중에는 한국에 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중략) 한국은 퍽 부유한 나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몹시 가난한 나라도 아니다. 중국 본토를 제외하고 중국문화권에 속하는 나라, 이를테면 한국, 일본,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은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경제성장 속도가 빠르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연 7%로 잡고 인구증가율을 연 2%, 연간 국민소득 증가율을 5%로 잡아 본다면 한국은 10년 후에는 중진국의 수준에, 25년 후에는 대중소비단계에 도달할 것이며, 그 후 10년이면 농업, 공업, 대중소비단계의 다음 단계인 탈공업 시대에 들어설 것이다. 이것은 막연한 예언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시나리오다.>

‘유교적 자본주의’ 개념 제시

허먼 칸은 왜 반복적으로 한국의 발전을 독려하는 주장을 펼쳤을까. 고은(高銀) 시인은 《경향신문》 1996년 1월 21일 자에 쓴 칼럼에서 ‘허먼 칸이 돈을 받고 그런 주장을 했다’고 썼다.

<한국에서는 박정희를 추켜세우기 위해서 허먼 칸이라는 뚱보가 자주 왔다. 국제 사기꾼이라는 악평을 듣기까지 하는 그는 언제나 한국을 핑크빛으로 찬양했다. 그것은 경제학자 로스토의 한국경제 이륙단계설과는 다른 무조건적인 찬양이었고, 그 찬양의 보수는 꽤 고액이었다 한다.>

제롬 글렌 박사는 “허먼 칸이 한국정부로부터 고액의 보수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며 “허먼 칸이 한국이 발전할 거라 외친 데에는 다른 요인이 있다”고 했다.

허먼 칸은 ‘유교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주창했다. ‘21세기가 되면 서구적 자본주의의 자리를 유교적 자본주의가 대체할 것’이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주장을 펼친 이가 바로 그다. 또한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경제발전이 더욱 견고하고 안정적으로 진행된다는 주장도 폈다. 허먼 칸은 자신의 예측이 옳다는 근거로, 한국의 성장을 들고자 했다는 것이 글렌 박사의 설명이다.

허먼 칸과 박 전 대통령, 비슷한 시기에 삶의 정점을 찍었던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등졌다. 박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4년 후인 1983년 7월 8일, 허먼 칸이 세상을 떠났다. 61세, 많지 않은 나이였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허먼 칸은 생소한 이름이다. 허먼 칸이 20년만 더 오래 살았다면 지금쯤 앨빈 토플러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를 능가하는 미래학자나 전략가로 알려져 있지 않을까. 허먼 칸의 행적을 좇던 기자에게 문득 든 생각이다. 그가 40여 년 전 한국 사회에 보여준 밝은 미래를 2014년의 한국은 어떻게 이뤄 나갈 수 있을까. 고민은 독자들의 몫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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