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장인의 손으로 빚어낸 영화다. 철저하게 통제된 화면과 손으로 한 땀 한 땀 기워서 만든 듯한 세트와 소품, 그리고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까지, 감독의 상상력과 취향의 결집체라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 피터팬'이라고 불리는 그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대중적이어서 '아이언맨' 시리즈에 열광했던 관객들이라도 충분히 즐길 만하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액자를 겹겹이 둘러싼 방식으로 전개된다. 현대에서 한 소녀가 '위대한 작가'의 동상 앞에서 책을 펼치면, 1980년대에 카메라 인터뷰를 하는 작가의 모습이 나온다. 이때 그는 1960대 주브로브카 공화국(가상 국가)의 쇠락한 호텔에서 만난 노(老)신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노신사가 다시 작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영화의 알맹이다. "그런 일이 있었지"란 식의 구전(口傳)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완전히 허무맹랑한 줄거리에 몰입하게 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엔 스무 명에 이르는 주연급 배우들이 출연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아트버스터’(artbuster·예술영화와 블록버스터를 합친 말) 장르의 창시자라고 할만하다.

1927년 세계 최고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다녀간 부호 마담 D(틸다 스윈턴)가 살해된다. 유산을 탐내는 아들 드미트리(에이드리언 브로디)의 모함으로 이 호텔의 지배인이자 마담 D의 연인인 구스타브(레이프 파인스)가 살인범으로 지목된다. 구스타브는 누명을 벗기 위해 호텔 로비보이 제로(토리 레볼로리), 빵집 아가씨 아가사(세어셔 로넌)과 함께 모험을 떠난다. 쇠락한 호텔에서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신사가 바로 제로다.

레이프 파인스가 연기한 구스타브는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의 별, 혹은 생크림 케이크에 올려진 딸기 같은 존재다. 그가 없었다면 분홍색으로 점철된 이 영화도 무채색처럼 보였을 것이다. 구스타브는 탈옥을 하면서도 '파나쉬'(위풍당당)란 향수를 뿌리고, 시도 때도 없이 시를 읊어대는 괴짜다. 호텔 업무엔 철두철미하지만 "젊을 땐 살코기가 좋았는데, 나이 드니 비계도 좋다"며 나이 든 투숙객들과 연애도 즐긴다. 무엇보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인 제로를 잡아가려는 군인들에게 "염병할 파시스트야, 내 로비보이를 내버려 둬"라고 소리를 지를 줄 아는 휴머니스트다. 나치즘과 파시즘이 횡행한 괴물 같은 시대에 감독이 던지는 농담과 냉소이다.

왁자지껄한 소동으로 시작한 영화는 낭만과 웃음, 휴머니즘으로 비정한 시대를 버티고 호텔을 지켜낸 구스타브와 친구들을 담담하게 추억하며 끝난다. 그 시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구스타브가 필요했던 것처럼, 무성의하고도 엇비슷하게 만든 대중영화에 질린 지금 관객에겐 앤더슨 감독과 이 영화가 꼭 필요하다. 20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