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살려준 독일군 알고 보니 히틀러... 아직도 발굴되는 1차 대전 비화들

  •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ㆍ‘영국인 재발견’ 저자
    입력 2014.03.20 10:58 | 수정 2014.03.20 11:10

    1차 대전 당시 전장에서 마주친 부상병 히틀러를 사살하지 않은 헨리 탠디.

    올해로 발발 100년을 맞는 1차 대전(1914~1918)은 유럽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전쟁에 얽힌 숱한 사연들이 여전히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몇 가지 대표적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우선 가장 흥미로운 ‘만일에(What if?)’에 관한 이야기이다. 히틀러를 1차 대전 때 사살할 수 있었는데 놔주어 2차 대전을 일으키는 악마가 되게 한 영국군 병사의 이야기다. 히틀러를 사살했다면 9400만명의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를 낸 2차 대전은 없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이야기다.

    히틀러가 하사관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1차 대전 중 부상당한 상태에서 영국군 병사와 조우해서 사살될 뻔했으나 영국군 병사가 살려줬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얘기는 헨리 탠디라는 영국 최고 무공훈장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훈장을 받은 군인은 이름 뒤에 항상 VC라는 약자를 쓰는 큰 영예를 갖는다)을 받은 군인이 1차 대전에 참전한 히틀러를 살려주면서 시작된다.

    탠디는 프랑스 전장에서 부상당한 독일군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탠디는 독일군이 부상당했음을 알고 총을 내려놓고 보내주었다. 독일군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생사가 순간적으로 엇갈리는 전선에서 27살의 영국군 탠디는 29살의 적군 아돌프 히틀러 하사를 살려준 것이다.

    탠디가 히틀러를 살려주었다는 엄청난 사실은 탠디의 주장으로 밝혀진 것이 아니다. 탠디는 자신이 살려 준 인간이 히틀러였음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희대의 악마 히틀러를 없앨 수 있는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를 자신이 저버렸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았다. 탠디는 1차 대전이 끝난 지 20년 지난 1938년, 당시 영국 총리인 챔벌린의 사무실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히틀러가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더라”는 총리의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당시 챔벌린 총리는 히틀러와 막 협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독일에서 챔벌린은 히틀러의 바바리아 별장에 초대를 받았다. 히틀러는 마침 자기 방에 있던 이탈리아 화가 포르추니노 마타니아가 그린 명화 ‘매닌 교차로’의 사본을 보여주면서 그림 중앙의 부상 전우를 등에 업은 인물이 자신을 20년 전에 살려준 영국 군인이라고 밝혔다. 히틀러도 우연히 그림을 보다가 전장에서 마주쳤던 영국 병사의 얼굴을 기억해 낸 것이다. 히틀러의 천재적인 기억력이 은인을 찾아낸 셈이다.

    히틀러는 당시 자신은 독일로 못 돌아가고 죽는다고만 생각했지 그 영국군이 자기를 살려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챔벌린에게 고백하면서 “신의 섭리가 나를 살린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챔벌린에게 자신을 살려준 은인을 찾아내 안부와 감사를 전해주기를 부탁했다.

    헨리 탠디 스토리를 보도한 지난 1월 18일자 영국 신문 홈페이지.
    이렇게 해서 탠디는 197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악마 히틀러를 쏘지 않은 사람’이라는 낙인을 가지고 살았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 탠디는 수많은 인터뷰 요청을 거의 거절했다. 그러면서 부상자이거나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이 인류 최고의 범죄자를 놔주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자책했다.

    탠디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자신이 싸웠고 전우들이 묻혀 있는 프랑스 전장 근처의 영국군인 묘지에 재를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바로 그 묘지가 히틀러를 살려준 장소 바로 옆이다. ‘히틀러를 쏘지 않은 사나이, 헨리 탠디와 아돌프 히틀러의 이야기(The Man Who Didn’t Shoot Hitler The Story of Henry Tandey VC and Adolf Hitler)’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1차 대전 유명 일화는 독일 포로수용소에 2년간 잡혀 있다가 독일 황제의 허락을 받고 고향에서 죽어가는 어머니를 뵙고 다시 포로수용소로 돌아간 영국 장교 로버트 캠벨 대위 이야기다. 대위는 1916년 고향의 어머니가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 편지를 포로수용소에서 받는다. 슬픔에 잠긴 당시 29살의 대위는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황제에게 어머니를 죽기 전에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주면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쓴다. 놀랍게도 황제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다면’이란 조건으로 허락한다. 대위는 고향에 돌아와서 임종 직전이던 어머니와 일주일을 보낸 후 독일의 포로수용소로 다시 돌아간다. 아들을 만난 지 4개월 뒤 어머니는 세상을 뜬다.

    당시 대위의 귀환은 독일 포로수용소를 놀라게 했다. 당연히 수용소 측은 대위가 거의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영국 군대가 대위의 귀환을 허락했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영국군은 대위가 원하더라도 귀환을 허락하지 말아야 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이런 사연은 최근 전쟁기록을 뒤지던 역사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 오고간 문서에서 나타난 얘기이다. 문서기록에 의하면 영국에 잡혀 있던 독일군 포로도 같은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독일에 가서 보고 오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영국 측은 독일 황제와는 달리 거절하고 만다. 캠벨 대위는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2년을 더 잡혀 있다가 1차 대전이 종전되고 나서야 석방된다. 2차 대전이 시작되자 다시 군입대를 했다가 196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지난해에 나온 ‘인간적인 모습의 1차 대전(The Human Face of The Great War)’에 나오는 일화 중 하나이다.

    거의 반대의 이야기도 있다.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서 300㎞를 넘게 숨어 걸어서 고향 웨일스로 돌아온 영국 군인 이야기다. 로버트 필립이라는 병사는 이런 영웅적인 탈출을 별로 자랑하지 않고 심지어는 가족에게도 숨겨왔는데, 사후에 손녀가 조사를 해서 찾아낸 사실이다, 1915년 5만명이 전사한 이프레스전투에서도 살아 남은 필립은 결국 부상당해 포로가 되었다. 독일로 실려간 후 여러 수용소를 거치며 15개월간 포로생활을 했다. 그러다 경비원 교대시간이 가장 빈틈이 많음을 알고 기회를 보다가 당당히 정문을 통해 탈출했다. 밤에 별을 보고 방향을 잡으며 걸어서 네덜란드까지 오게 된다. 중간에 위기도 많았지만 수용소에서 배운 독일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주변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면서 걸어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이 유일하게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서 돌아온 병사의 스토리다.

    또 다른 사연은 영국 시골 북부지방 요크셔 한 귀퉁이 마을 버나드 캐슬의 스미스 부인 이야기다. 부인의 6명 아들은 1916년 모두 참전을 해서 다섯 명이 전사를 한다. 다섯 번째 아들의 전사통지 편지를 받고 세상이 무너질듯 슬픔에 잠긴 스미스 부인을 본 동네 성당 신부가 당시 왕 조지 5세의 부인 메리 여왕에게 편지를 썼다. 스미스 부인은 이미 5명의 아들을 국가에 바쳤으니 하나 남은 아들만이라도 살아 남게 해달라는 간곡한 호소가 담긴 내용이었다. 얼마 후 궁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국방부에 필요한 조치를 해달라고 요청했으니 같이 기다려 보자는 내용이었다. 결국 여섯 번째 아들은 여왕의 호혜로 무사히 돌아와 어머니를 지켰다는 해피 엔딩이다.

    1차 대전 역사상 가장 풀리지 않던 미스터리 하나도 최근 풀렸다. 1차 대전 참전군인 중 가장 어린 12살 소년의 얘기다. 주인공은 나이를 속이고 입대를 했던 시드니 루이스. 12살 소년이 입대했다는 사실은 당시 신문에 나서 알려지긴 했는데 그 이후 아무런 공적 문서로도 인적사항을 추적할 수가 없어서 공식 확인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시드니의 사진이 1차 대전 100주년을 맞아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이를 알아본 시드니의 아들이 아버지가 맞다고 확인을 해주면서 제대로 된 인적사항이 확인됐다. 이와 함께 ‘최연소 입대 참전 공식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차 대전 연구 학자들은 100년 묵은 의문이 풀리는 사건이라고까지 흥분했다.

    시드니가 입대할 당시 최소 입대 연령은 19세였다. 하지만 나이가 12살4개월밖에 안 된 시드니는 나이를 속인 채 집에도 얘기를 안 하고 입대를 했다. 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어 걱정을 하던 어머니는 제대한 동네 청년으로부터 아들이 입대를 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어머니는 즉시 군 당국에 편지를 썼다. 그러고도 한참 뒤에야 철없는 용감한 아들은 어머니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드니는 그 8개월 사이 6만명의 전상자를 낸 프랑스 솜전투까지 참전했다. 현재 80세인 시드니의 아들은 아버지가 생전에 자신이 1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다고 했다. 1903년생인 아버지가 그냥 만들어내서 하는 소리로 치부하고 말았다고 했다. 1969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면서야 이것이 사실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랬는데 이제 신문기사뿐만 아니라 공식기록에도 남는 것을 보고 용감한 아버지를 둬서 더욱 자랑스럽다고 했다. 또 아버지의 말을 생전에 안 믿었던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후회했다.

    돌아온 성경에 관한 스토리도 화제다. 이사 간 집 다락방에서 발견된 1차 대전 전사자 조지 포드의 성경이 거의 100년 만에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이야기다.

    조지의 가족들은 1918년에 전사한 조지의 소지품이 집으로 돌아왔으나 다락방에 올려 놓고 이사 갈 때 까맣게 잊어버렸다. 1977년에 이사 온 알란이 집수리를 하다가 발견했다. 그 이후 알란은 성경 주인의 생존 친척을 출생·사망·결혼 기록 등을 통해 찾으려 노력했다. 시간 날 때마다 취미처럼 성경 주인을 추적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공개된 1911년 인구조사 서류를 뒤져서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인구조사에서 조지 누나의 이름과 주소를 발견하고 혹시나 하면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낸 결과 누나의 아들, 즉 성경 주인 조지의 조카가 편지를 받아 연결이 됐다. 100년이 지나도 같은 주소에 아직 살고 있었던 덕분이다. 편지로 확인을 한 알란은 소포로 보내도 될 성경을 무려 200㎞를 달려가서 직접 전달했다. 조지의 조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동생 조지는 특별한 존재였음이 틀림없다며 그런 삼촌의 성경을 직접 손에 드니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알란은 그동안 역사적 가치 때문에 성경을 상당한 금액으로 팔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팔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알란의 조사 덕분에 조카들은 삼촌의 묘지가 프랑스 솜에 있음도 알게 되어 방문을 계획하고 있다. 거의 100년 전에 죽은 사람의 낡은 성경 하나를 돌려주기 위해 37년간 수고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나, 100년간 한 주소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정말 영국인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다.

    영국의 1차 대전 연구가들은 별것도 다 찾아낸다. 현재 일상생활에서 매일 쓰이는 영어 단어 중에 1차 대전 중 참호에서 만들어진 ‘참호 단어(trench words)’들을 찾아냈다. 폭음(bong drink), 설거지(wash-up), 편한 즐거움(cushy), 진저리 난다(fed up), 스냅사진(snapshot), 놈(bloke), 제명되다(wash out), 죽어서 묻히다(pushing up daisies), 불결하다(lousy), 기념품(souvenire), 슬쩍 훔치다(swipe)가 그런 것들이다.

    1차 대전 연구가들은 벨기에의 생 생포리엥 묘지에 1차 대전 참전 영국 군인 중 가장 먼저 죽은 군인과 가장 나중에 죽은 군인이 5m를 두고 이웃해서 묻혀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망 당시 16살이던 병사 존 파라는 1914년 8월 21일에 죽어 제일 먼저 전사한 군인이 되었고, 조지 엘리슨이라는 병사는 종전 1시간 전인 1918년 11월 11일 10시에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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