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기자의 씨네칵테일] '노예 12년' 속 '반성하는 인간'과 '현실 안주형 인간'

입력 2014.03.14 06:00

1841년 뉴욕 시민으로 살다 노예로 끌려가 혹사당한 흑인 음악가의 끔찍한 실화가 소재
"노예제에 갇혀 상식을 잃은 백인 주인보다, 인간 존엄 위해 싸우는 노예가 자유인"드러내

올해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인 ‘노예 12년(12 Years a Slave)’은 한 단계 진화한 흑인 노예 영화입니다. 뻔한 ‘흑인 인권 영화’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흑인들이 노예제도에 참혹하게 희생됐던 과거사를 상기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좀더 보편적인 테마를 녹여냈습니다. 반 인간적· 반 문명적 제도에 안주하는 인간형과, 세상의 부조리를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현실에 도전하는 인간형들을 극명하게 대조시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 영화 속 질문은 오늘에도 유효하기에 울림이 묵직합니다.

흑인 노예들의 참혹한 삶이 스크린 가득 펼쳐집니다. 1841년, 뉴욕에서 가족과 행복하게 살던 바이얼린 연주자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에게 어느날 악몽이 덮칩니다. 나쁜 백인들에게 납치돼 워싱턴에 노예로 팔려 갑니다. ‘나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솔로몬이 아무리 외쳐도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을 맞을 뿐입니다. 흑인 음악가가 하루아침에 '플랫'이라는 이름의 흑인 노예가 됩니다. 가족에겐 연락도 못 한채 수수· 목화 농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립니다. 멀쩡하게 자유인으로 살다가 노예로 전락하니, 일반적 노예보다 몇 배 더 고통이 끔찍합니다.

흑인 감독 스티브 매퀸은 잔재주 부리지 않고 원작에 담긴 끔찍한 진실을 차분하게 옮겨 관객들로 하여금 참혹한 현장을 응시하는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특히 솔로몬이 밧줄에 목이 반쯤 졸린 채 뙤약볕에 서서 가혹행위를 당하는 대목 등 끔찍한 몇 대목은 커트 없이 장시간 찍는 ‘익스트림 롱 테이크’ 기법을 써서 숨죽여 지켜보게 하며 관객들 마음에 긴 잔상을 남깁니다.
행복하게 살던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프)네 가족의 모습. 그러나 솔로몬은 어느날 백인 일당에게 납치돼 흑인 노예로 팔려가고 12년 간의 악몽이 시작된다.
'노예 12년'에서 뉴욕에 살던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 오른쪽 첫번째)이 노예로 팔려가 에드윈 엡스(마이클 패스벤더)의 목화 농장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그날 그날의 노예별 수확량을 체크하는 자리에서 주인 엡스는 여자노예 팻시(루피타 뇽)에게 성희롱도 서슴지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예와 주인의 대결 구도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노예 제도에 관한, 노예들이나 주인들의 생각들이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노예들 중에도 노예제도를 자신들이 어쩌지 못하는 실체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노예를 부리는 주인 중에도 이 제도가 과연 옳은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솔로몬의 첫 주인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노예 주인 중에서는 비교적 양질의 인간입니다.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상대해 주며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목화 농장주 에드윈 엡스 (마이클 패스벤더)는 최악의 주인입니다. 노예를 한 마리 짐승처럼 여기며 혹사시킵니다. 마음에 안들면 반 미치광이처럼 채찍을 휘둘러 노예들을 피투성이로 만듭니다. 여자 노예 팻시(루피타 뇽)를 그야말로 ‘성 노예’로 삼는 ‘짐승’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노예제’라는 시스템에 착 붙어서 단물만 빨아 먹으며 사는 인간형입니다.

사실 그 시절 대부분의 백인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포드의 농장에서 일종의 중간관리자로 노예들 위에 군림하며 솔로몬을 학대하는 목수 티비츠(폴 다노) 역시 노예제에 안주하며 사는 인간입니다. 그가 너무 솔로몬을 괴롭히자 보다 못한 주인 포드가 막아설 정도입니다. 티비츠는 노예들을 인간이 아니라 백인이 소유하고 이용하는 물건이라고 확신하는 듯합니다.
'노예 12년'에서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프)이 만난 주인들중 가장 악독한 에드윈 엡스(마이클 패스벤더, 왼쪽). 노예들을 하나의 소유물로만 여기는 그는 노예들을 가혹하게 부리고 여자 노예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
영화 속 흑인 노예들 중에도 ‘반성하는 인간형’이 있고 ‘현실 안주형’ 인간형이 있습니다 노예제를 반성하는 대표적 노예는 주인공 솔로몬입니다 합리적 지성과 상식을 가진 그는 이 비인간적 제도에 분노하며,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자유를 향한 꿈을 접지 않고 도전을 계속합니다. "나는 목숨을 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다"고 그는 말합니다. 숨이 붙어 있는게 사는 게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게 사는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솔로몬과 달리 많은 노예들은 노예제도를 ‘움직일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여기며 일찌감치 순응하기로 작정한 듯 살아갑니다. 노예제에 대한 도전은 무모한 것이라 여기며, 차라리 주인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들게 일해 빵 한 조각이라도 더 받는게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포악한 주인 엡스와 분노한 노예 솔로몬의 대립은 ‘백인 대 흑인’ 혹은 ‘주인 대 노예’의 싸움일 뿐 아니라 ‘현실 안주형 인간’ ‘반성하는 인간’의 부딪침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면 몸이 자유롭고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주인 엡스가 자유로운 인간인 듯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제도에 갇혀 영혼의 자유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팽개치고 욕심만 좇는 짐승같은 삶을 살면서도 반성하지 못하니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지도 못합니다.

이에 비하면 인간의 자유를 생각하고 도달해야 할 이상을 꿈꾸는 솔로몬이 훨씬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노예 12년’은 기득권을 가졌으나 인간성을 내던진 인간보다 고통받고 있어도 자유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위대한지를 형상화한 영화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반성하는 인간들과 현실안주형 인간들은 있어 왔습니다. 우리 역사 속 일제강점기에도 고난의 항일 투쟁을 펼친 민족 운동가들과, 일제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렸던 친일 모리배들이 양극단의 삶을 살았습니다 정의가 살아 있는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낸 힘이 잘못된 시스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반성하고 도전한 사람들의 공이라는 사실을 ‘노예 12년’이 새삼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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