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신도시에서 보낸 30년… 삶의 '뿌리'는 얕지만 자유롭다

입력 2014.03.03 03:03

은희경 연작소설집 '…단 하나의 눈송이'
살면서 스쳐가는 타인·시간 이야기

은희경 신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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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 아닌가요. 고향 상실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죠. 한국의 신도시에 태어나서 자란 아이들에게 고향이란 신기루 같은 것이죠."

서울 외곽 신도시에서만 30년째 살고 있는 소설가 은희경. 1984년 과천 신도시에 입주했다가 십 년 뒤 고양 신도시로 옮겼다. 그녀는 일산에 살며 작가로 데뷔한 뒤 20년 동안 일곱 권의 장편소설과 다섯 권의 소설집을 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 '아내의 상자'를 비롯해 신도시를 무대로 설정한 작품이 여럿이다.

은희경이 연작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를 펴냈다. 신도시에서의 삶을 뿌리가 얕은 식물에 비유한 연작 단편들로 꾸며졌다. 은희경은 "신도시는 새로 만들어지는 공간임에도 욕망과 소비를 위해 먼저 있던 것이 자꾸 폐기되고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는 도시"라고 했다. 새 소설집에 실린 단편 '프랑스어 초급과정'에서 신도시는 '공상과학영화에서 본 황폐한 미래 세계'처럼 그려진다. 끝없이 파헤쳐진 회색땅, 감시탑처럼 박혀 있는 타워크레인, 여기저기서 입 벌린 구덩이들, 죽음의 군대처럼 열병해있는 음산한 고층 아파트들.

“올해는 새 스타일을 실험하는 데 부담이 없는 단편을 많이 쓰겠다”는 소설가 은희경 사진
“올해는 새 스타일을 실험하는 데 부담이 없는 단편을 많이 쓰겠다”는 소설가 은희경. /이명원 기자
주인공은 서울의 옛동네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반대한 남자와 결혼했다가 집안에서 파문당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서울에서 신도시로 이주해 오다가 차멀미를 심하게 한다. 멀미는 아버지의 땅에서 버려져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는 통과의례의 고통이다. 주인공은 새 환경에 삶을 심어가려고 애쓰면서 언젠가 프랑스로 떠날 날을 꿈꾸며 지루한 일상을 버틴다.

소설은 주인공이 신도시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바이올렛을 옮겨 심는 것에 비유한다. 바이올렛 잎을 면도날로 자르고 물컵에 넣어두면 잘린 단면으로 싱싱한 뿌리가 솟아난다. 뿌리가 여럿이 되면 화분의 흙에 옮겨 심는데, 몇 달이 지나면 하얀 뿌리에선 하얀 꽃이, 보라색 뿌리에선 보라색 꽃이 핀다. 은희경은 "신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신도시로 이사해서 자라는 경우가 많다"며 "그 아이들은 뿌리가 얕은 대신 어디로 가든 잘 뿌리를 내릴 줄 안다"고 했다. 고향 상실로 인해 더 자유로운 정신적 유목민(遊牧民)이 된다. 그러면서 그들끼리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울려 지낼 줄도 안다는 것이다.

은희경 소설은 초기엔 냉소와 위악으로 삶의 풍속도를 신랄하게 조롱했다. 그런데 최근 은희경 소설에서 연민과 위로가 늘어나고 있다. '삶이란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짓다가 사라지는 별과 같다'는 연민이 소설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 삶에 대한 은희경의 위로는 수다스럽지 않고 기지개처럼 간결하다. 소설 속 인물은 무기력하게 살다가 잠시 기지개를 켜곤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런 짧은 기지개가 삶을 이어가게 한다. 은희경 소설은 독자들에게 잠시 영혼의 기지개를 켜라고 속삭인다.

이번 소설집에 대해 작가는 "우리가 살면서 스쳐 지나가는 타인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과 스쳐 지나간 적이 있기에 삶이 변화했는지도 모르잖아요. 어깨에 힘을 빼고 쓰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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