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선의 태평로] 아직도 '겨울 왕국'에 사는 한국 여성들

  • 주말뉴스부장 강인선

    입력 : 2014.02.27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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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선 주말뉴스부장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 선수단이 귀국했다. 두 주 내내 밤잠을 설치게 했던 선수들은 8개의 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왔다. 굳이 성별을 나눠 세자는 건 아니지만 전체 메달 중 7개를 여자 선수들이 따냈다.

    소치올림픽에서 여자 선수들의 메달 행진이 이어지자 아들 둔 엄마들은 "이젠 딸들을 군대 보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여학생에게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는 사관학교에서도 여학생이 수석 졸업을 하는 마당이니 이런 얘기가 나올 법도 하다. 각종 고시와 입학시험, 판검사 임용 때 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건 기정사실처럼 됐다. 일부 조직이나 학교에선 소수가 되어버린 남자를 배려해주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소치올림픽이 끝날 무렵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이 '대한민국 1호 여성' 12명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 자리엔 기업·은행·법조 등 분야에서 최고 리더로 1호를 기록한 여성이 참석했다. 1995년에도 비슷한 행사가 있었다. 지금의 여성가족부 장관에 해당하는 정무2장관이 사회 각계 1호 여성을 한자리에 모았다. 건설 회사와 언론계의 첫 여성 이사를 비롯해 '여성 1호' 파출소장, 검찰 수사관, 육군 소대장, 지하철 승무원, 기술사가 참석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분야가 달라지고 직위가 더 높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여성 1호가 화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지난주 본지 주말 섹션 와이(Why?)가 대한민국 '여성 1호' 20명을 만났다. 그들의 평균 모습은 '54세, 자녀 두 명, 아침엔 6시에 일어나고, 휴가는 1년에 나흘 갈까 말까 한 직장 여성'이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살면서도 입원해봤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남성 위주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찌감치 건강관리를 해온 결과일까.

    '여성 1호'가 화제가 되는 직장이란 여성들에겐 찬 바람과 눈보라가 불어대는 '겨울 왕국'이란 뜻이다. 여성 1호들은 여자가 거의 없는 조직에서 남자들보다 두세 배 더 일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들은 "힘들고 아프겠지만 용기를 내서 유리 천장을 깨라"고 했고 "퇴직이나 경력 포기는 생각도 말라"고 했다.

    사정은 1호가 아닌 여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주말 30·40대 여성 모임에 갔다가 여전히 추운 겨울 왕국에서 분투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두 아이를 둔 30대 전업주부는 자신을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라고 소개하더니 "아이들 좀 키워놓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엄마를 더 필요로 해 쉽지 않더라"고 했다. 역시 두 자녀의 어머니인 40대 직장인은 "20년 넘게 회사 다니다가 1년 휴직하고 아이들 돌보다 다시 일터로 왔더니 분위기가 냉랭하더라"고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쏟아지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느라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소치에서 여자 선수들이 다투어 메달을 따고 여성들이 수석을 휩쓸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은 겨울 왕국에 산다. 산기슭엔 꽃 피는 봄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산봉우리 근처엔 만년설(萬年雪)이 쌓여 있는 것이다. 우선은 여성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분야에서 더 많은 여성 1호를 배출하는 것이 과제이다. 하지만 '여성 1호'란 말이 사라질 때 여성들의 겨울 왕국에 진정한 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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