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 그에겐 붓이다

조선일보
  • 김미리 기자
    입력 2014.01.28 03:04

    -한국화가 조환 개인전
    철판 자르고 다듬어 수묵화로 표현… 그림자가 濃淡처럼 보여 착시효과

    조환 성균관대 예술학부 교수.
    "성한 데가 없지요." 그는 소매를 둘둘 말아 올렸다. 채 아물지 않은 화상 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러고는 바짓단을 쑥 접어 올렸다. "양말도 늘 이 모양입니다. 허허." 용접할 때 불똥이 튀어 숭숭 구멍 나 있었다.

    마치 용접공과 마주한 듯했다. 올해로 쇠 주무르길 일곱해째인 작가 조환(56·성균관대 예술학부 교수·사진). 지금은 쇠가 손에 착착 감기지만, 원래 얇은 화선지에 수묵으로 그림 그려온 한국화가다.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해 1986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을 탔다. 서예를 바탕으로 평면에서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오다가 쇠로 설치 작업을 시작하면서 사각의 화폭(�幅)을 뛰쳐나왔다.

    최근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을 찾았다. 문을 열자 하얀 벽을 가득 채운 3m 넘는 검은 소나무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커다란 붓으로 휙휙 그린 수묵화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니 반전의 디테일이 말을 걸어왔다. 해풍(海風)에 한쪽으로 기운 가지부터 바늘처럼 가는 솔잎까지, 두께 1.6~5㎜ 철판을 잘라 이어 붙인 흔적들이 보인다. 빨간 꽃을 피운 매화, 보드라운 댓잎을 단 대나무도 쇠였다.

    "쇠는 분명히 붓보다 표현하기 용이한 재료는 아닙니다. 하지만 표현의 한계가 생략을 만들고, 생략으로 더 함축적이 되지요." 작가는 "제한된 재료를 뛰어넘어 전통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싶어 무감성(無感性)의 철을 찾았다"고 했다.

    연하디연한 필(筆)을 뒤로 물리고 강하디강한 철(鐵)에 이르렀지만, 부단한 수련으로 작가는 쇠를 붓처럼 쓸 수 있게 됐다. "붓의 살아있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매끈한 레이저 커팅을 쓰지 않는다. 전기 절삭기로 철판을 일일이 자르고, 망치로 두들겨 거칠게 다듬는다. 철판 끝을 둥그렇게 다듬어 장두호미(藏頭護尾·붓을 둥글게 대 획의 처음과 끝이 드러나지 않게 함)도 재현하고, 방향 바꿔 중첩해 전절(轉折·획과 획의 방향을 바꾸는 것)도 표현한다.

    쇠 조형물이 빛과 하얀 벽을 만나 그림자를 낳음으로써 비로소 작품이 완결된다. 그림자가 농담(濃淡)처럼 표현돼 진짜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 같은 착시효과가 난다. 이를 두고 작가는 "내 작품은 완성(完成)되는 게 아니라 빛과 공간으로 만나 생성(生成)된다"고 했다.

    붓으로 그린 수묵화가 아니다. 쇠를 자르고 망치로 두드려 이어 붙여 만든 조형물이다. 빛을 만나 하얀 벽에 생긴 그림자가 먹의 농담(濃淡)처럼 보인다.
    붓으로 그린 수묵화가 아니다. 쇠를 자르고 망치로 두드려 이어 붙여 만든 조형물이다. 빛을 만나 하얀 벽에 생긴 그림자가 먹의 농담(濃淡)처럼 보인다. /학고재 갤러리 제공
    전시의 절정은 갤러리 가장 깊숙한 곳에서 펼쳐진다. 당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이 흘려 쓴 반야심경 260자를 쇠로 만들어 벽을 타고 지상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 옆엔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를 갈 때 탄다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뒀다. 작가가 어릴 적 고향 부산 낙동강변에서 봤던 나룻배를 떠올려 만든 배다.

    화이트 큐브를 만났으면 자칫 반감됐을 법한 작품이 학고재라는 전통의 공간을 만나 감동이 배가(倍加)됐다. 이 갤러리는 건축가 최욱이 원래 있던 한옥 두 채의 골격을 살려 개조했다. 쇠로 빚은 묵향(墨香)이 한옥 서까래의 나무 향을 만나 더욱 깊고 진하게 퍼진다. 강퍅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고요한 위안이 될만한 전시다. 다음 달 9일까지. (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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