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시작가(價) 부르세요!"

1936년 11월 22일 서울 퇴계로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장. 말간 조선백자 한 점이 탁자에 올랐다. 목이 길고 보름달 같은 몸체에 난초와 국화, 나비를 세 가지 색으로 돋을새김한 독특한 양식. 훗날 국보 294호로 지정된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이다. 시작가는 500원. 여기저기서 호가를 부르더니 순식간에 8000원을 넘었다. "더 없으십니까?"

"9000원!" 일본인 남성이 손을 번쩍 들었다. "1만원!" 또 다른 남자가 받아친다. 경매는 둘의 숨 막히는 경합으로 이어졌고, 호가는 500원 단위에서, 10원 단위까지 낮아졌다. 낙찰가 1만4580원. 1만4550원에서 포기한 일본인은 당시 세계적 골동품 회사였던 일본 야마나카(山中)상회의 주인 야마나카였다. 그보다 30원을 더 불러 백자를 손에 쥔 조선 남자는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 번듯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 하던 때였으니 백자 한 점을 기와집 15채와 맞바꾼 셈이다.

야마나카상회가 뭐기에

최근 미국 허미티지박물관에서 돌아온 조선불화(佛畵) '석가삼존도'는 일본 골동품상 야마나카상회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떠돌았다. 청화백자를 놓고 간송과 낙찰 경쟁을 벌인 그 골동상이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2팀장은 "20세기 초반 미국과 유럽으로 나간 한국 문화재 대부분은 야마나카상회를 거쳐 팔려나갔다"고 했다. 뛰어난 감식안을 갖고 있던 사장 야마나카 사다지로(山中定次郞)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고려불화 등의 가치를 알아봤고 대량으로 사들여 미국·유럽의 수집가에게 팔았다.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 프리어 새클러 미술관에 있는 한국 문화재 수백 점도 대부분 야마나카상회에서 입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업가 찰스 L. 프리어(1856~1919)가 기증한 아시아 미술품으로 1923년 개관한 미술관. 2012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지원을 받아 발간한 '프리어 새클러 미술관 소장 한국 미술품' 영문 도록에는 유물의 출처와 구입 경위, 가격까지 상세히 적혀 있다. 1896년 구입한 16세기 차(茶) 사발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분청사기, 매병·정병 등 고려 청자까지…. 디트로이트에 머물던 프리어는 한 달에 한 번 야간 기차를 타고 뉴욕 야마나카 매장에 들러 물건을 싹쓸이했다.

고려불화와 혜원 화첩, 상반된 운명

수완 좋은 야마나카는 프리어를 '특별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도록에는 1909년 2월 3일 야마나카가 프리어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우리가 기다리던 한국 컬렉션이 이틀 전에 도착했습니다. 틀림없이 마음에 드실 터이니 하루 속히 방문해 주십시오." 편지를 받은 프리어는 곧바로 뉴욕에 갔고, 비취색 고려청자 석 점을 구입했다. 국내에 10여 점밖에 없는 귀한 고려불화도 이 미술관에 석 점이나 있다. 이 중 '수월관음도'와 '아미타팔대보살도'가 야마나카를 경유해 이곳으로 흘러갔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도 하마터면 이런 운명에 처할 뻔했다. 달빛 아래 남녀의 밀애 장면을 그린 '월하정인' 등 풍속화 30점이 야마나카에게 넘어간 것을 알게 된 간송은 1934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간송은 야마나카와 밀고 당기는 흥정 끝에 2만5000원(요즘 가치 75억원)을 주고 화첩을 되찾아왔다. 조선 풍속화의 백미로 평가받는 이 화첩은 후에 국보 135호가 됐다.

"야마나카 목록 분석 중"

승승장구하던 야마나카상회는 이후 해체의 길을 걷는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함께 미국 정부는 '적국자산관리국(Office of Alien Property Custodian·APC)'을 통해 미국 내 일본 자산을 압수한다. 야마나카상회의 모든 미술품이 몰수돼 경매에 넘겨졌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943~1944년 뉴욕 경매에 나왔던 도록을 확보해 분석 중이다. 강임산 팀장은 "말로만 떠돌던 야마나카 목록의 실체가 나왔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에도 국보급 문화재가 널리 퍼져 있음이 확인된 것"이라며 "미국 국립문서기록 보관서를 찾아가 유물의 유통 경로를 추적할 계획"이라고 했다.


☞야마나카상회

메이지(明治·1868~1912) 후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오사카 본점 외에 뉴욕·보스턴·런던·파리 등에 지점을 두고 있던 세계적 명성의 동양미술상. 19세기 중반 오사카에서 표구사로 시작해 1895년 뉴욕 지점을 시작으로 영미권에 진출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 등 미술관과 개인 수집가를 대상으로 미술품을 매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