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 늘었지만… '느림의 멋' 잃는 슬로시티

입력 2014.01.13 03:03

[전남 청산도 등 '슬로시티' 지정 후 본모습 잃고 시끌벅적]

관광車 진입 위해 농로 포장, 금지된 '펜션' 편법 써가며 운영, 신용카드 단말기도 속속 등장

관광사업 무리하게 늘린 장흥
"지나치게 상업적" 이유로 재인증서 아예 탈락하기도

전남 완도군 청산도(靑山島) 동쪽 노적도 전망대 부근 쓰레기 소각로에선 요즘 연방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관광객들은 "늘 푸른 청정 섬이라더니 무슨 소각로냐"는 반응이지만 지난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이후 겨울에도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생긴 현상이다. 섬에서 30년을 거주한 문화관광해설가 박은선씨는 "청산도가 유명해지면서 겨울 풍경이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고 했다.

'느림의 섬' 청산도의 지난해 관광객은 36만9000명이었다. 2007년 9만명에 비해 6년 만에 4배가 늘어난 것으로, 현재 섬 인구 2600명의 142배에 달한다. 슬로우걷기 축제가 열리는 4월부터 성수기가 되면 하루에만 관광객 9000여명이 밀려온다. 완도항과 청산도 도청항을 잇는 카페리호는 하루 10여 차례로 늘어나고, 이 배에 실린 45인승 관광버스 수십대가 섬을 돌아다닌다. 성수기 하루 배출 쓰레기는 3~4t에 달하기 때문에 현재 소각장은 이미 포화 상태다. 청산도는 오는 4월 새 소각장을 가동할 계획이다.

완도군 청산도를 찾아 카페리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 관광 성수기인 4월이 되면 청산도 인구(2600여명)의 3.5배에 달하는 9000여명의 관광객이 하루에 쏟아져 들어온다.
완도군 청산도를 찾아 카페리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 관광 성수기인 4월이 되면 청산도 인구(2600여명)의 3.5배에 달하는 9000여명의 관광객이 하루에 쏟아져 들어온다. /전남 완도군 제공
전통문화와 옛 농경 모습을 간직해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슬로시티로 지정된 청산도엔 명암이 교차하고 있다.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주민 소득은 증대했으나, 조용했던 섬 특유의 장점은 오히려 퇴색했기 때문이다. 이 섬의 문화 전문가들은 이를 "슬로시티의 딜레마"라고 말한다.

청산면 주민센터 직원은 "징하지라, 징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성수기 때면 전체 직원 23명이 휴일을 반납하고 종일 관광객을 맞이해요. 하지만 대도시 관광지 수준의 편리함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 각종 민원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청산도는 관광 차량 진입 편의를 위해 호젓한 농로에 도로를 포장했고, 숙박 시설과 음식점도 늘렸다. 슬로시티 지정 이후 거의 없었던 신용카드 단말기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1981년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청산도에선 펜션 사업이 금지돼 있었으나 지금은 일부 외지인과 주민이 편법으로 '펜션형 민박'도 세우고 영업 중이다. 등록된 108개 민박 중 사실상 펜션이나 다름없는 민박업소가 2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완도군은 파악하고 있다. 군은 2011년 11월 경관 관리 지침을 마련해 주민과 공무원이 합동으로 환경 훼손을 감시하고 있지만, 법규 사이의 틈새를 파고드는 영업을 막지는 못하고 있다.

국내에는 청산도를 비롯해 전남 담양군 창평,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경북 청송군 부동·파천, 충북 제천시 수산·박달재 등 10곳이 국제슬로시티의 인증을 받아 슬로시티로 등록돼 있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일부 지자체들은 관광객 증가와 함께 편의시설 확충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뜻밖의 반작용도 일어나고 있다. 전남 신안 증도는 지난 2010년 육지와 잇는 증도대교가 개통된 이후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느림의 미'를 강조하는 슬로시티 취지와 동떨어진다는 지적과 함께 지난해 7월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재인증 보류' 판정을 받았다. 전남 장흥군은 슬로시티를 내세워 다양한 관광 사업을 진행했다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재인증서 아예 탈락했다.

전남발전연구원 김준 책임연구위원은 "청산도의 장점을 파괴하면서까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은 피해야 하며, 관광객들도 불편함이 섬 관광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내 슬로시티 마을 모두 '느리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슬로시티라는 관광 브랜드를 잃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슬로시티

1999년 이탈리아 소도시 오르비에토에서 슬로푸드 먹기와 느리게 살기를 표방하며 시작된 ‘치타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에서 비롯됐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의 승인을 얻어야 슬로시티 명칭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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